[임병식 칼럼] 우리는 홍범도 장군을 제대로 모시고 있나

2023-08-3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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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논설위원]



국방부가 육사 교정에 있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한다. 반대 여론이 일자 철거가 아닌 이전이라고 한다. 정부는 “특정 시기에 활동한 분들을 육사 교정에 두는 건 적절치 않다. 보다 많은 국민들이 만날 수 있도록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해명이 됐든 변명이 됐든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이념논쟁은 참담하다. 독립군 영웅에게조차 이념 굴레를 씌우고 난타하는 정부가 제 정신인지 묻고 싶다. 더불어민주당은 ‘부관참시’라고 했는데 홍범도 장군 업적을 감안하면 과하지 않다. 일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장군을 생각하면 죄송하고 죄송하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있을 수 없다.
지난해 가을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와 크질오르다를 다녀왔다. 두 곳은 연해주에서 추방된 고려인들이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스탈린은 1937년 8월 21일 고려인 추방을 결정했다.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고려인 17만명은 영문도 모른 채 긴 유랑길에 올랐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까지는 6700~6800㎞에 이른다. 수많은 이들은 기차 안에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숨졌다. 기록은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한다. 또 이듬해 봄까지 많은 이들이 황량한 벌판에서 중앙아시아 칼바람을 이기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다. 추방 이유는 일본인과 비슷하기에 간첩 활동을 막는다는 것인데 터무니없었다.

지금 세대들에게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로망이자 버킷 리스트다. 86년 전 고려인들에게 시베리아 횡단은 목숨과 맞바꾼 고난의 행로였다. 그 가운데 홍범도 장군이 있었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 6월 독립군 역사상 첫 승리로 기록된 봉오동 전투를 지휘했다. 독립신문은 일본군 사망자 157명, 중상자 200명, 경상자 200명으로 보도했다. 독립군은 사망 1명, 중상 2명에 그쳤다. 또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도 승리로 이끌었다. 홍범도 장군 아내는 고문 끝에 옥중 사망했다. 또 두 아들(양순, 용천)도 장군과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다 전사했다. 큰아들이 숨진 날 그는 일기에 “내 아들 양순이 죽었다”고 담담하게 적었다. 아내와 아들을 가슴에 묻고 다시 전장터로 향했을 장군의 비장함을 우리는 헤아릴 수 없다.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70대 생을 시작했다. 뒤늦게 장군의 실체를 알게 된 고려인과 현지인들은 그를 극진히 예우했다. 고려극장 대표는 홍범도 장군을 극장 수위로 채용했다. 홍범도 장군은 극장에서 고려인 동포들과 교류했다. 고려극장은 1942년 홍범도 장군 일대기를 다룬 연극 <의병들>을 무대에 올렸다. 장군은 숨을 거두기 전까지 동포들과 <의병들>을 보며 당시를 회상했다고 한다. 카자흐스탄 정부도 홍범도 장군을 정중하게 대접했다. 그들은 장군이 거주한 집 부근 도로를 ‘홍범도 도로’로 명명했다. 또 1984년 크질오르다에 홍범도 장군 묘역을 대대적으로 조성했다.

고려인 동포들은 매년 기일(1943년 10월 25일)이면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 카자흐스탄 입국신고서에 홍범도 장군은 입국 목적과 희망을 ‘고려독립’이라고 적었다. 크질오르다 홍범도 장군 묘에는 ‘조선의 자유독립을 위해 제국주의 일본을 반대한 투쟁에 헌신한 조선 빨치산 대장 홍범도의 이름은 천추만대에 길이길이 전하여지리라’라고 새겨져 있다. 홍범도 장군은 머슴 출신 포수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을 맡아 수많은 전쟁터를 누빈 장군의 삶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는 일생을 조국 독립에 헌신했다.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긴 발자국은 깊고 넓다.

윤석열 정부가 문제 삼는 소련 공산당 입당 전력은 무지한 역사인식이다. 당시 상황을 지금 이념 잣대로 들이대는 건 몰지각하다. 1920년대 미국과 소련은 같은 편에서 독일과 일본을 상대했다. 독립운동가들 중 소련 공산당원도 적지 않다. 지난 8월 14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최재형 또한 소련과 우호적으로 지냈다. 그는 러시아 군대 도움을 받아 무기를 구매했다. 또 직속 고려혁명군과 볼셰비키 혁명군은 손을 잡고 일본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소련과 가깝게 지내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건 시대 상황이다. 지금 들이대는 잣대는 철 지난 이념 과잉일 뿐이다.

2021년 8월 문재인 정부는 홍범도 장군 유해를 국내로 봉환했다. 당시 유해 봉환과 함께 홍범도 잠수함 명명에다 육사 흉상도 함께 설치했다. 국민 여론은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장군에 대한 합당한 예우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독립군 영웅에게 편협한 이념 잣대를 들이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았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월 국무회의에서 골프와 이념을 빗대 “우리나라는 골프로 치면 300야드를 날릴 실력이 있는데 공이 날아가는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 소용없다”며 이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상당 부분 공감한다. 에너지를 한 곳에 모으면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에 용이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존중할 때 강하다. 더구나 날아가는 방향이 옳은지 그른지는 누가 판단하나. 진영에 따라 또는 집권세력의 이념 성향에 따라 오락가락한다면 갈등만 부채질할 뿐이다. 윤 대통령은 29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 “철 지난 사기 이념에 우리가 매몰됐다”며 문재인 정부와 야당을 거세게 비난했다. 윤 정부가 전 정부를 깎아 내리기 위해 홍범도 장군을 선택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홍범도 장군 유해를 보내면서 고려인 동포와 현지 사회는 아쉬움을 표했다.

유해를 떠나보내면서 압드칼르 코바 굴샤 크질오르다 주지사는 “영웅 홍범도 장군이 고향 땅에서 편히 쉬셨으면 좋겠다. 또 미래 세대가 그의 공훈을 숭배하며 기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람과 달리 지하에 있는 홍범도 장군은 편히 쉴 수 없다. 미래 세대가 흠모하고 기념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크질오르다 홍범도 장군 묘역을 관리했던 김 레프 니콜라예비치는 “유해가 한국에 간다는 건 우리 고려인들 마음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별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123년 만에 홍범도 장군 유해를 모실 수 있었던 건 온전히 고려인 동포들 덕분이다. 그해 봉환식 캐치프레이즈는 '장군의 귀환, 이제야 모시러 왔습니다'였다. 진영으로 갈라진 한국 사회는 아직도 장군을 모시지 못하고 있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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