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동농 김가진 선생(1846~1922) 집안이 다시 조명되고 있다. 김 선생 손자이자 ‘상하이 임시정부의 아들’로 불린 김자동 선생 별세 1년(23일)이 계기로 작용했다.
김자동 선생은 1928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임정 외교위원을 지낸 부친 김의한 선생(1900∼1964)은 재정난에 빠진 임정 안살림을 챙겼다. 모친 정정화 선생(1900~1991)은 여성의 몸으로 군자금 마련을 위해 여섯 번이나 국내에 잠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김자동 선생은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어린 시절 김구, 이동년, 이시영 등 임정 인사들 품에서 자랐다. 독립지사들에게 총애를 받아 ‘임정 소년’이란 애칭도 붙었다.
김자동 선생 할아버지인 김가진 선생은 구한말 농상공부 대신 등을 지낸 개화파 관료다. 그는 1910년 나라를 잃은 뒤 실의에 빠져 두문불출하다 3·1운동을 만났다. 이후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낀 김가진 선생은 1919년 10월 3남 김의한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동농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실패한 ‘대동단 사건’을 일으킨다. 임시정부 고문과 백야 김좌진 장군 휘하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았던 김가진 선생은 1922년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국가보훈부는 김가진 선생에 대해 서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가진 선생 장례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다. 하지만 100년이 지나도록 유해는 돌아오지 못했고 서훈도 시행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