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내면의 빛과 만날 용기

2023-07-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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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 작가] 



내 안의 법은 무엇인가
며칠째 비가 내린다. 충남 이남 지역에 막대한 인명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있다. 재수 없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비 내리는 창가에 기대어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참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에 비 내리는 것이 싫지 않다. 인지부조화의 한 면일 것이다. 어릴 적에도 장마 때면 아버지는 논물 보느라 종일 논에 나가 도랑물이 넘치지 않나, 논두렁이 터지지 않나 살펴보시며 애간장을 태우는데 나는 도랑물에 붕어라도 잡겠다고 족대를 훑고 다녔다.
지금도 휴대폰에는 비 피해가 없도록 산이나 물가에 나가지 않도록 경고하는 메시지가 자주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빗물이 창문에 빗살무늬를 그려대며 내리는 창밖 풍경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나를 움직이는 법은 무엇인가. 나를 나다운 독립된 실체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커피를 마시며 문득 드는 생각은 내가 만일 커피콩이라면, 아니 어떻게 하면 커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를 떠올리며 나에게 묻는다.
나에게 묻는다.
커피 원두 찌꺼기 함부로 버리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는 커피처럼 자신을 로스팅한 적이 있느냐.
 
사람들은 글이 안 써질 때 커피를 마신다.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기면 커피를 찾고, 기쁘거나 즐거울 때도 커피를 찾는다. 커피는 이제 우리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음료가 되었다. 커피의 맛이나 향, 색깔을 얻기 위해서는 로스팅이라는 과정을 겪는다. 생콩은 맛도 없거니와 그라인더로도 잘 갈리지 않는다.
한 인간의 삶도 커피와 같은 과정을 겪지 않고는 자기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 나의 맛을 나게 하려면 나의 삶을 태우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심취하여 자신의 삶을 다 바쳐 뜨겁게 태워 화학적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 삶은 날콩처럼 밋밋한 맛이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변화를 거부하는 고집불통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자신의 삶을 뜨겁게 불태운 사람은 그 삶에서 광채가 나고 향이 난다. 때깔이 좋고 향이 난다고 해서 거기서 멈춘다면 원두에 지나지 않는다. 그라인더에 들어가 아주 곱게 갈려야 한다. 자신의 존재 형체가 완전히 사라진 가루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완전히 부정된 가루가 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 바닥까지 완전히 내려가 영혼까지 완전히 우러났을 때 커피에서 그윽한 향이 난다 하고, 맛은 쓰지만 달기도 하다는 평을 듣는다. 처음엔 맛이 쓰지만 마실수록 깊은 맛이 나야 좋은 커피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의 맛

사람에게도 맛이 나고 향이 나는 삶이 있다.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 사람에게서 나는 사람 냄새다. 아직도 이런 말을 하냐며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이 아니라면 평범하게 슬슬 놀면서 평안하게 사는 게 좋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주변에는 많지만 우리가 삶에 활력을 얻기 위해 커피를 찾듯이 사람도 뭔가 최선을 다해 삶을 불태우는 사람 곁에 있어야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며칠 전 최진석 교수님이 비슷한 경험을 글로 쓰셨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내려놓는 삶에 대해 말했다. "참되게 사는 길은 내려놓고, 비우고, 욕심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사니 행복하고, 오히려 마음은 충족감으로 가득하다." 그러면서 자신은 고향에 내려가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눕고 싶을 때 눕고 사니 이 이상 행복할 수가 없고 자유로울 수가 없단다. 집에 가는 길에 나는 혼자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인간은 자고 싶을 때 자면서 고유한 특성을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고 싶어도 안 잘 수 있어서 인간이다. 인간은 먹고 싶을 때 먹으면서 고유한 특성을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먹고 싶어도 안 먹을 수 있어서 인간이다. 인간은 눕고 싶을 때 누우면서 고유한 특성을 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눕고 싶어도 안 누울 수 있어서 인간이다.”
인간은 사실 편한 상태를 추구하지만 그 편한 상태를 만들기 위해 불편을 감수해왔다. 오늘날의 문화나 문명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적인 여성해방은 세탁기와 전기밥솥이 발명되면서부터다. 이런 가전제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노력이 더해졌다. 이런 과정을 모르고 결과물만 취한다면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다. 시끄럽고 귀찮게 하면 떡 하나 더 준다는 것으로, 상대가 감정이 상하면 더 떼를 쓰니 잘 달래주어 후환이 없게 한다는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개인이나 조직, 특히 정치 성향의 단체행동이 딱 이 모양이다. 이성적이지도 않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내용을 마치 화학조미료만으로 맛을 낸 요리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들어 여기서 파생되는 이익을 취하려는 모습이다. 줏대가 없는 사람은 자기 판단이나 생각이 없으니 떡 하나에 넘어가거나 떡 하나 더 달라는 무리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면 가난한 구두공과 천사를 등장시켜 우리로 하여금 ‘사람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모든 사람이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고 앞날을 계획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마음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몇 해 전 북해도에서 P라는 여성을 만났다. 북해도 아시히카와시에는 아시히야마라는 동물원이 있는데 일본 최북단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최고 인기의 동물원이다. 북극곰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펭귄유치원 같은 시민 친화적인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이다. 아사히야마 동물원의 한국어 해설이 바로 P씨 목소리다. 그녀의 목소리나 글은 이 지역 관공서나 관광지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으며, 한국에서 방송이나 드라마 촬영을 올 때도 대개 P씨를 통할 정도로 이 지역에선 제법 유명 인사다. 한국에 가장 많은 작품이 소개된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고향이 아사히카와인데 P씨의 삶이 미우라 작가와 비슷했다. 그녀는 ‘그림자 없는 삶’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제 삶은 북해도 겨울바람처럼 춥고 외로웠어요. 생명줄을 놓고 싶을 때가 많았죠. 그렇지만 북해도에도 봄이 있어요. 산 같은 눈을 녹여 예쁜 꽃을 피우는 고운 햇살이 있더라고요. 이웃들에게 고운 햇살처럼 살려고 무척 노력했어요. 나누면서 살려고 하니 같이 살아지네요.”  
 
마음의 법, 이데올로기 그리고 진영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이나 ‘남을 위해 살아가라’는 말 또는 홍익인간의 ‘남을 이롭게 하라’는 말은 공통점이 있다. 이타적 삶이다. 이런 삶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쩨쩨한 삶이 아니며 궁색하지 않다. 기독교가 신과 개인 간의 약속을 중요시 여기지만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유교는 삼강오륜이라고 해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지만 그 중심에는 자신을 낮추려는 겸허가 있다. 불교는 모든 현상의 인연을 중시하며 현재의 인터넷망처럼 연결된 인연의 우주적 인드라망(불교에서 끊임없이 서로 연결되어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를 뜻하는 말)에서 자신의 내면의 빛을 강조하고 있다. 역시 그 중심은 타인을 향한 연민과 용서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의 법을 어겼을 때 느끼는 수치심이다. 마음의 법을 양심 혹은 본심이라고 한다. 개인에게 양심이나 본심이 있다 없다는 논쟁으로 성선설과 성악설이 갈리기도 한다. 진영 논리에선 기존의 선도 악의 개념으로 달라진다. 우리 쪽이 이기면 선이고 상대가 이기면 모든 것이 악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내면의 나와 만나는 것이다. 내면의 나와 만날 수 있는 용기다. 사람이 외적인 규율에 움직이면 타율적이고 자신의 규율에 움직이면 자율이다. 무수한 인연의 알고리즘에서 나의 내면의 빛과 만날 수 있는 용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해야 되는 것은 서로가 그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다. 그것이 내 마음의 법이 아닐까.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다.

그림설명
정리정돈
청소는 사물이 제 각각의 쓸 자리,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일종의 코디네이팅이다. 즉, 정리정돈(整理整頓)하는 것이다. 理를 정하고 頓을 정한다. 유학의 理気논쟁을 整하고 불교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을 整하는 것이 청소가 아닐까.
청소하는 아주머니조차 돈오세계를 깨우치고 이기논쟁을 청소걸레 하나로 잠재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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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정리정돈 - 청소는 사물이 제 각각의 쓸 자리,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일종의 코디네이팅이다. 즉, 정리정돈(整理整頓)하는 것이다. 理를 정하고 頓을 정한다. 유학의 理気논쟁을 整하고 불교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을 整하는 것이 청소가 아닐까. 청소하는 아주머니조차 돈오세계를 깨우치고 이기논쟁을 청소걸레 하나로 잠재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두수 작가 제공].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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