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연대의 파업이 북핵과 같은 위협’이라는 말에서 우리 사회의 일각을 현 정부가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파업을 북한의 핵으로 비유한 것은 ‘파업 노동자는 곧 적’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이 정부의 적대세력인 것도 마찬가지다. ‘바이든, 이XX’라고 보도했던 것을 “날리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당 언론에 제재를 가하는 것은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의무인 언론을 적으로 취급하는 행위다. “바이든”으로 들리는 것을 미국의 입장을 고려해 “날리면”으로 들었어야만 했다면 많은 국민을 기만한 사대주의의 일단이 아닌가. 어딘가 변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는 진실을 끝까지 밝히기를 거부하고, 외면할 것만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날리면’이 우리 국회를 지칭했다는 것은 당시 정황이나 언맥 상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 미국을 위해 발언을 회피하는 의도적 짜맞추기라면 참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윤석열 정부하에서는 야당 의원도 촛불 국민도 모두 정부의 적으로 취급된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야당 의원을 ‘헌정질서를 흔드는 세력’으로 규정하였으니. 촛불 국민들은 의당 헌정질서를 흔드는 반국가세력이나 다름없다.
북한은 이제 우리의 엄연하고 노골적인 적이다. 문 정부 때는 '주권, 국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은 그 어떤 세력이든 적으로 간주했다. 북한이 적대적인 세력이지만 평화협력에도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그런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윤 정부에서 북한은 그런 전략적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분명한 적일 뿐이다. UAE(아랍에미리트연합)의 적을 이란으로, 한국의 적은 북한임을 전 세계를 향해 천명하지 않았는가. 이란이 미국만 한 국가가 아니라서 그 발언의 보도를 그대로 둔 것이었을까? 아니면 이란에 대한 미국의 행동과 생각에 동조하기 때문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미국에 잘 보이기 위해서였을까? 외교 무대에서는 국익을 고려한 표현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알 만한 사람 다 알 터인데 말이다. 실수라면 엄청난 실수다.
적대적 세력과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싸울 일만 남았을 뿐이다. 선제타격에 원점타격, 북한 무인기 이후 압도적 전쟁 준비강화, 자체 핵 보유 언급 등이 이를 웅변한다. 북한 주적 인식에 통일부는 애써 토를 단다. “북한이 남한의 현존하는 군사적 위협인 동시에,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대화와 협력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허구에 가깝다. 실체를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화와 협력을 일체 하지도, 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유엔 북한 인권 결의안 공동제안국에도 복귀하려 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누가 봐도 정치적인 행위임을 알 수 있다. 북한 인권 문제에 침묵하는 부류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종북’으로 몰리지나 않을까? 정쟁의 도구로 삼기에도 충분하다.
대북한 악마화는 독재를 위한 정치적 의도로 이용되기 쉽다. 체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거나 저항하는 세력을 적으로 내몰면, 악마화에 익숙해져 있는 구성원들은 이에 쉽게 동의한다. 군사독재 시절의 매카시즘과도 같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진전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도 따지고 보면 북한 악마화라는 인식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북한 악마화의 장본인은 다름아닌 미국이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에 대한 악마화를 집요하게 추구해왔다. 그들의 가치로 선과 악을 재단해 북한을 악마화했다. 미국에게 북한은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제거 대상일 뿐이다. 각종 경제 제재는 악마를 붕괴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정치˙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고, 동북아 패권을 확보하는 한편, 한국의 안전을 명분으로 북한 문제를 주도하고, 미국산 무기의 구매를 종용하는 것이다. 한국이 그동안 세계 제1위의 미국산 무기 수입국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통해 세계 제5위의 군사 강국이 되었다. 무기 구매를 종용하기 위해 군사적 갈등과 긴장을 부추길 때도 많다. 정보의 왜곡도 마다하지 않는다. 북한의 위협을 과대 포장해 불안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북한 악마화는 결국 북한의 붕괴와 직결된다. 악마인 북한을 제재하고 끊임없는 압박을 가해야만 북한 주민들이 봉기해 북한 정권을 붕괴시킬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현 정부를 비롯,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미국의 이 같은 의도에 협력하고 따르는 것을 바른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북·미 관계에 스스로 종속시킴으로써 미국의 대북한 악마화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2023년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통일은 갑자기 온다, 따라서 준비해야 한다“는 국정최고권자의 발언도 북한 붕괴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단연코 아니다. 대북한 악마화를 통한 ‘북한 붕괴’는 가능하지도 타당하지도 않다. 그럴수록 북한은 내적으로 더 똘똘 뭉친다. 그럴 경우, 우리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을 초래하게 된다. 지난 수십 년간 북한 붕괴론이 되풀이되었으나, 그것이 근거 없는 망상임이 이미 증명되고도 남지 않았는가. '북한 악마화'를 계속하면 할수록 남북 대결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 우리가 주도권을 쥘 수 없게 된다. 우리 문제와 관련한 사안에 한국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한국의 외교적 주도권이 사라지는데 미국이나 중국이 우리를 한반도 문제에 대한 공동결정의 파트너로 받아들이겠는가? 대북한 악마화는 지금 당장이라도 멈추고 바꾸어야 한다. "북한은 모든 것이 다 그르고, 우리는 무엇이든 다 옳다”라는 악마화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올바른 남북관계의 시작이다.
김영윤 필자 주요 이력
▷독일 브레멘대학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원 ▷통일연구원 북한경제연구센터 소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