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 감정이 되돌릴 수 없이 악화한 것은 1932~1933년에 벌어진 소련의 대기근(홀로도모르) 때였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에서 가장 너른 곡창지대였지만 굶어 죽은 사람은 소련에서 가장 많았다. 다른 공화국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게 곡물 수확량을 할당받았기 때문이다.
1933년 1~4월 소련 당국은 우크라이나인들이 감추고 내놓지 않는 곡물을 수색해 압류했다. 심지어 봄에 뿌릴 씨앗까지 빼앗아 갔다. 곡물을 은닉한 농부들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이렇게 수탈당한 우크라이나 곡물이 다른 공화국으로 수송되는 바람에 정작 곡창지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된 것이다.
2003년 유엔 기구는 홀로도모르 조사를 통해 우크라이나인 700만~1000만명이 사망했다고 공표했다. 그러나 최근 학계의 연구 결과로는 350만~500만명이 희생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 밑에서 외교 고문으로 일한 가레스 존스 기자는 연합국 기자 최초로 아돌프 히틀러를 인터뷰했다. 이에 고무된 그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인터뷰하겠다며 소련으로 갔으나 인터뷰가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소련 당국의 감시를 피해 우크라이나를 탐방한 존스 기자는 대기근을 취재하던 중 한 소녀에게 고깃국물을 얻어먹는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밖에 나가보니 눈밭에 있는 오빠의 시신에 훼손된 흔적이 보였다. 그냥 굶어 죽느냐, 눈 속에 냉동된 시신이라도 먹어야 하느냐? 육체적 생존의 투쟁이자 중대한 모럴의 문제였다. 결국 인육(人肉)을 못 먹은 순한 사람들이 먼저 죽었다.
소련의 식량 징발로 1933년 우크라인 500만명 아사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자연재해와 인간의 실패가 최악으로 합쳐진 결과였다. 급속한 산업화와 집단농장 정책의 실패, 계획경제의 오류로 빚어진 인간이 만든 대기근이었다.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들은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스탈린이 홀로도모르 대기근을 악화시킨 것으로 본다. 소련은 1932년까지 우크라이나어 교육기관들을 모두 폐쇄했다. 우크라이나어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체포되고 추방되었다. 스탈린 치하에서 수만 명에 이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반소비에트’ ‘반혁명’이라는 낙인이 찍혀 체포돼 사형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스탈린은 기근이 발생하자 우크라이나인들을 말살하려고 기획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곡물 수탈을 했다.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벌이면서 홀로도모르와 비슷한 전략을 썼다. 학교와 병원, 아파트에 포격을 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의 생존에 필요한 발전소 등 인프라를 파괴했다. 러시아 군대는 전쟁 개시 직후 우크라이나 농부들에게서 곡물 50만톤을 약탈했다. 민간인 구호물자 공급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선대들이 겪은 홀로도모르를 떠올리며 죽느냐 사느냐의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독일과 싸우는 데 소련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기근의 참상을 알리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진실은 하나뿐”이라며 홀로도모르 대기근을 보도한 존스 기자는 1935년 8월 네이멍구에서 산적들에게 납치됐다. 그와 동행한 가이드는 소련 비밀경찰과 연루돼 있음이 밝혀졌다. 존스는 30세 생일 하루 전 총에 맞아 살해됐다. 소련 당국이 필사적으로 숨기고자 했던 홀로도모르의 진실을 알린 데 대한 보복으로 추정된다.
소련 체제에서 홀로도모르 대기근에 대한 토론이나 보도는 금지됐다. 우크라이나의 한 역사학자는 소련 정부가 학자들에게 대기근에 대해 ‘피할 수 없었던 자연재해’로 서술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그것이 공산당과 스탈린의 유산을 지키는 길이라는 지시였다.
2024 대선 앞두고 갈수록 푸틴에 불리한 전쟁
홀로도모르에 대한 토론과 연구의 문을 연 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 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가계의 혼혈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어린 시절에 대기근을 경험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1933년 고향 마을에서 거의 절반의 인구가 굶어 죽었다. 그중에는 고르바초프의 두 누나와 아버지의 형제도 포함돼 있었다’고 밝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과연 핵무기 사용 위협은 러시아의 말폭탄에 그칠 것인가.
러시아가 2014년 전쟁 때처럼 우크라이나가 쉽게 손을 들리라고 판단한 것은 결정적인 착오였다. 소련이 해체되면서 1991년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도 골치 아픈 존재였다. 러시아는 체첸이나 조지아처럼 작은 나라들이 대들면 탱크로 밀어 초토화해 버리다시피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다음으로 영토가 넓은 나라이고 인구도 4100만명에 이른다. 이번 전쟁에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벌인 10년 전쟁보다 더 많은 병사가 죽었다.
외국으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전쟁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나온 러시아 신병들은 똘똘 뭉친 우크라이나 군인들의 전투력과 서방이 지원한 디지털 신무기 앞에서 맥을 못 쓰고 있다. 러시아 군인들의 군기도 엉망이다. 러시아 병사들은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러시아 고향에 있는 친구들이나 친지들과 통화하다 위치를 노출시켜 우크라이나 포탄에 몰살당하는 참극도 벌어졌다.
러시아군은 포탄이 바닥나 북한산·이란산을 수입해 전쟁을 치르는 판이다. 미국은 러시아 폭격기와 미사일에 시달리는 우크라이나에 패트리엇 방공 미사일 시스템을 제공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훈련을 시키고 있다. 소련이 우세를 보이는 공군력과 미사일이 힘을 못 쓰게 될 판이다.
러시아는 핵전쟁을 위협하고 있지만 정작 사용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소련이 전술핵을 쓰면 미국과 유럽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가 전술핵을 사용한다면 잃는 게 훨씬 크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 선박에 대해 지중해와 흑해 진출을 막아 러시아를 내륙국가로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크림반도 양보로 러시아에 퇴로 열어줘야”
올 하반기로 접어들어 2년 동안 전쟁이 계속되면 러시아 재정이 전비를 감당하기 어렵다. 러시아가 작년엔 그럭저럭 버텼지만 기름값·가스값도 떨어져 가고 러시아 경제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그때쯤에는 서방에서도 우크라이나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내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크라이나가 동부 루한스크주와 도네츠크주를 되찾더라도 크림반도에 대해 러시아 영유권을 인정하는 정도에서 휴전안이 성립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우크라이나도 서방의 지원 없이는 전쟁을 끌고갈 수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를 점령하고 불법적인 국민투표를 시행해 러시아 영토로 합병했다. 크림반도는 원래 러시아 영토였다. 스탈린이 죽고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고 나서 1954년 크림반도 영유권이 러시아 공화국에서 우크라이나 공화국으로 넘어갔다. 큰형 러시아가 동생에게 주는 선물 형식이었지만 크림반도에서 터키계 타타르족과 우크라이나를 대립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러시아로서는 흑해함대 때문에도 크림반도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협상에서 흑해함대 모항인 세바스토폴 군항을 러시아가 계속 사용하게 하는 제안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 우주기업 스페이스X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우크라이나에 스페이스X의 위성 인터넷 사업인 스타링크 서비스를 제공했다. 우크라이나로서는 천군만마의 도움을 받은 셈이다. 우크라이나를 도왔던 머스크는 "크림반도는 원래 러시아의 영토였다. 전쟁을 끝내려면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2024년에 러시아 대선이 있다. 시간이 갈수록 러시아와 푸틴에게 유리한 것은 없다. 전황이 계속 밀리면 푸틴은 재출마를 포기하고 후계자를 내세우는 방안도 고민할 것이다. 러시아 권력층 내부에서 전쟁의 출구를 찾자는 실용주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용병집단인 바그너 그룹과 러시아 군부의 갈등으로 복잡한 상황이 전개될 여지도 있다.
이번 전쟁은 올여름이나 가을을 고비로 크림반도를 놓고 결판이 날 가능성이 높다.
<논설고문·카이스트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