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현지시간) 영국 패션 거장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향년 81세로 사망했다.
그의 패션하우스는 이날 트위터를 통해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오늘 런던 남부 클래펌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며 “세상이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비비안 같은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웨스트우드는 1970년대 펑크룩을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록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의상에 가죽, 고무, 플라스틱 등 다양한 재료 사용을 통해 저항 정신을 드러냈다. 펑크룩이란 1970년대 후반 런던 노동계급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반항적인 패션을 일컫는다. 웨스트우드는 여성의 나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입술에 옷핀을 꽂은 사진 등 다소 충격적인 이미지를 옷에 사용했다.
1992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수여하는 훈장을 받을 때도 속옷도 입지 않은 채 속이 다 비치는 망사 드레스를 입고 버킹엄 궁전에 등장해 세간의 화제를 끌었다.
웨스트우드는 지난 2014년 자서전에서 “내가 패션업계에 있는 유일한 이유는 ‘순응’이란 단어를 파괴하기 위해서다”라며 “이것이 없다면 내게 흥미로운 것은 없다”고 밝혔다.
웨스트우드는 1941년 4월 8일 영국 잉글랜드 중부에 위치한 글로섭의 한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비비안 이사벨 스와이어다. 그는 2차 세계대전과 전후 복구 및 재건 시기에 성장했다.
성장 배경 때문인지 패션에 재활용품을 많이 사용했다. 캔버스, 도로변 현수막, 버려진 가죽, 자물쇠나 버려진 금속 등을 패션에 접목했다. 그는 “잘 선택하고 덜 사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곤 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첫 번째 남편인 데릭 웨스트우드를 만나면서 성이 웨스트우드로 바뀐다. 1963년 아들 벤을 낳고, 1966년 이혼했다.
미혼모가 된 웨스트우드는 런던의 골동품 상점가인 포토벨로로드에서 쥬얼리를 팔았다. 그러던 중 미술을 공부하던 말콤 맥라렌을 만나면서 인생의 새 장이 열린다. 맥라렌은 펑크록 그룹 섹스 피스톨즈의 매니저였다. 웨스트우드와 맥라렌은 섹스 피스톨즈의 스타일링을 담당하면서 펑크룩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섹스 피스톨즈가 해체된 후 둘은 1981년 첫 캣워크 쇼를 열었다. 당시 40대였던 웨스트우드는 자신만의 패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초 맥라렌과 헤어진다.
웨스트우드의 패션은 코르셋, 해리스 트위드 수트, 태피터 직물 등으로 상징되곤 한다. 1985년 선보인 엉덩이 부분을 부풀린 스커트 미니 크리니(Mini-Crini) 등도 유명하다.
1993년 모델 나오미 캠벨이 웨스트우드가 디자인한 굽이 40cm가 넘는 신발 플랫폼을 신고 무대에서 내려오던 중 넘어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패셔니스타들이 웨스트우드의 파리 런웨이 쇼에 몰려들면서 웨스트우드의 옷과 액세서리, 향수 등을 파는 매장은 전 세계에 문을 열게 된다.
웨스트우드는 패션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정부 지출 정책에 항의하는 등 저항 정신을 드러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그는 2018년 패션 잡지 로피시엘과의 인터뷰에서 “항상 정치적 어젠다가 있었다”며 “현상 유지(status quo)에 도전하기 위해 패션을 사용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