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정치 9단'의 뒷모습

2022-12-2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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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위원]

무난하리라 예상했던 박지원 전 국정원장 복당이 한바탕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지난 16일 최고위원회의 직후 “박 전 원장 복당 문제를 논의했으나 최고위원 간 견해차가 있었다. 지도부에서 더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며 부정적 분위기를 전했다. 복당을 앞장서서 반대한 인물은 정청래 최고위원이다. 정 최고위원은 복당에 반대하는 5가지 이유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가장 큰 이유는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있지만 막상 복당하면 칼을 겨눌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복당한 뒤 이재명 대표 체제를 흔들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없다. 불길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감이 깔린 반대가 아닌가 싶지만 수긍이 가는 대목도 적지 않다.

한국 정치사에서 박 전 원장만큼 화려한 이력을 갖춘 이는 흔치 않다. 그는 정치 입문 이후 문화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 국정원장, 4선 중진 의원을 지냈다. 또 여야를 넘나들며 원내대표 3차례, 비상대책위원장 3차례를 맡아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제3당일지언정 국민의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민생당 당적을 유지한 채 국가정보원장에 임명돼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그는 19대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를 연일 강도 높게 비판함으로써 ‘문모닝’이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였다. 정 최고위원이 “문 대표를 흔들고 분당 사태를 일으켜 민주당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 인물” “한 번 탈당한 사람은 또 탈당할 수 있고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배신할 수 있다”며 직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주당은 19일에야 박 전 원장 복당을 의결했다. 논란 끝에 얻은 복당이지만 모양새는 구겨졌다. 앞서도 그는 국민의당 입당에 대해 “귀신이 씌었다”는 말로 자신을 부정했다. 그는 현역 정치인 가운데 최고령(80)에 속한다. 1983년 김대중 대통령을 따라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지 40년째다. 그동안 한국 정치에서 보여준 활약은 축구로 비유하자면 메시급이다. 축구 팬 입장에서 메시와 박 전 원장을 동렬에 놓는 게 불쾌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일별했듯 정치 이력을 보자면 과장된 비유는 아니다. 다만 메시는 고령임에도 대미를 영광스럽게 장식한 반면 박 전 원장은 마무리가 아름답지 못한 ‘상갓집 개’ 신세가 됐다는 점에서 다르다. 프랑스와 맞붙은 결승에서 골을 넣은 디마리아는 열두 살 때 메시와 찍은 기념사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런 그는 이번 월드컵에서 메시와 합작해 골을 넣었다. 다른 선수들 역시 메시와 함께 땀과 눈물로 FIFA컵을 들어 올렸다. 메시는 ‘축구의 신’이라는 명성을 내려놓고 후배들과 함께 땀 흘리고 호흡하며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박 전 원장은 여의도 정치판에서 ‘정치 9단’으로 통한다. 그만큼 능수능란하다. 국회의원 재직 당시는 뛰어난 언변과 정보력으로 상임위 활동을 주도했다. 또한 깔끔하고 명쾌한 메시지와 동물적인 정치 감각을 밑천 삼아 뉴스 중심에 있었다. 국정원장 퇴임 이후에도 활발한 방송 활동으로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다. 그는 이념보다 실용을 중시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 비판과 지지의 경계를 넘나든 것도 이 때문이다. 큰 틀에서는 문 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정의연 사태 때는 윤미향 의원과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자 “잘한 결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도어스테핑’을 중단하자 “좁쌀 대응, 언론을 상대로 공갈하고 있다”며 날을 세웠다. 오랜 정치 경험에서 나온 균형 감각이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다. 메시가 후배 동료들과 협력해 아르헨티나 축구를 정상에 올려놓았다면 박 전 원장은 개인기만 두드러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가벼운 언행은 대표적이다. 그는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 인사청문회에서는 “개인적 감정은 풀자”는 말로 공사를 혼동하고, 또 <뉴스버스>가 윤석열 검찰총장 고발 사주 의혹을 보도하기 3주 전에는 이를 제보한 정치인과 호텔에서 만나는 등 부적절한 언행으로 도마에 올랐다. 어지러운 당적도 비판 대상이다. 그는 2008년 18대 총선에서 공천에 탈락하자 민주당을 탈당했다. 이후 복당했지만 2016년 1월 또 탈당해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이후에도 민주평화당, 대안신당, 민생당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좋게 말하자면 이념과 노선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고심에 찬 결정이다. 비판론자들은 양지만 쫓아다닌 ‘생존 정치’로 폄훼한다. 어찌 됐든 그가 지닌 정치 자산 가운데 균형감은 여의도 정치가 인정할 만하다.

영화 <두 교황>에서 베네딕토 교황과 베르고글리오 추기경(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보면서 출신 국가를 응원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결승전에서 독일과 아르헨티나가 격돌했는데 공교롭게도 교황은 독일, 추기경은 아르헨티나 출신이었다. 태어난 나라도 다르지만 베네딕토와 베르고글리오는 대척점에 있었다. 베네딕토는 전통과 의식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 베르고글리오는 소탈하고 파격을 좋아하는 개혁주의자였다. 그런데도 둘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했다. 베네딕토는 종신직인 교황을 내려놓고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에게 평화적으로 교황권을 넘겨주었다. 만류하는 베르고글리오에게 베네딕토는 “주님은 항상 새로운 교황을 보내 이전 교황의 잘못을 시정한다. 어떻게 내 잘못을 바로잡을지 보고 싶다”고 답한다. 아름다운 뒷모습이다.

이런 정치를 보고 싶다. 상대를 존중하고 정치적 성향은 달라도 배려하는 성숙한 정치가 절실하다. 민주당원 자격을 회복한 박 전 원장은 2024년 22대 총선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비등하다. 그가 5선 반열에 오르기보다 좋은 후배 정치인을 기르는 어른으로 남길 바란다면 과욕일까. 그동안 어지럽게 눈밭을 걸었던 마지막을 아름답게 갈무리하고, 나아가 평생 몸담았던 민주당에도 동력을 불어넣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했으면 한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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