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가 빠른 속도로 둔화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각국이 통화 긴축정책을 펼치는 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글로벌 수요 위축까지 겹친 탓이다. 한국 경제도 예외는 아니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 여파에다 소비심리마저 가라앉아 암울하다. 우리 경제에 드리운 먹구름은 갈수록 짙은데 정치권은 무책임하고 뻔뻔하다. ‘조문 정국’이 마무리되기 무섭게 여야는 정쟁에 돌입했다. 야권은 국정조사 카드와 촛불로 정부와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여당은 국가적 재난마저 정파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민주당에 날을 세우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경제 쓰나미’를 넘기 위한 협치는 절실하지만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11월 경제동향’ 보고서를 통해 “최근 우리 경제는 대외 여건 악화에 따라 성장세가 약화하는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앞서 9월과 10월에는 ‘경제 회복세 약화’라고 했으나 아예 ‘성장세 약화’라는 표현을 썼다. 그만큼 부정적이라는 의미다. 특히 우리 경제를 지탱해온 10월 수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7% 감소했다. 2020년 10월 이후 2년 만에 마이너스(-)로 전환했다. 주력 품목인 반도체 낙폭은 17.4%로 가장 컸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글로벌 경기 하강과 중국 봉쇄 등 대외 여건 악화로 세계 교역이 둔화하고 있다”면서 “당분간 증가세 반전은 쉽지 않다”며 비상한 각오를 밝혔다.
위기 상황을 반영하듯 국책연구기관과 민간연구기관은 한목소리로 1%대 저성장을 전망했다. 하나금융연구소는 내년 성장률을 1.8%로 예측했다. 연구소는 “고물가와 고환율, 고금리 영향으로 성장 둔화는 불가피하다. 또 글로벌 통화 긴축과 해외 수요 위축에 따른 수출 여건 악화도 국내 경제에는 불안 요인”이라고 했다. 또 대신증권은 1.6%, 한국경제연구원은 1.9%를 전망했다. 국제신용평가기관 피치(Fitch)도 1.9% 전망치를 내놓았다. 조동철 KDI 교수는 ‘2023년 경제·산업 전망 세미나’에서 “한국은행은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현재 2.1%에서 1%대로 낮출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1%대 성장은 1998년 국제 금융위기,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위기를 제외하면 가장 낮은 성장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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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대외 요인도 널려 있다. 한국 수출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 경제 불확실성은 가장 큰 변수다. 시진핑 3연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코로나19 봉쇄 조치를 해제할 기미가 없다. 또 배럴당 90달러대를 유지하는 국제 유가도 불안 요인이다. 가파른 미국 금리 인상은 국내 금리와 격차를 벌리며 금융시장을 짓누르고 있다. 미국 중간선거 결과 또한 낙관하기 어렵다. 어느 당이 의회를 장악하든 자국 경제를 우선하는 정책은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바이든 정부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발의함으로써 우리 기대를 저버렸다. 미국은 경제 문제만큼은 정당을 초월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극단적 대립을 이어가는 여의도 정치와 비교된다. 총체적 경제위기를 앞에 두고도 우리 정치는 정쟁에만 매몰돼 있다. 내년 살림살이를 심사하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조차 ‘이태원 참사’ 뒷전으로 내몰렸다. 지난 7일 김진표 국회의장이 양당 원내대표와 함께한 3자 회동은 어렵게 마련된 자리였다. 그럼에도 양당 지도부는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를 놓고 의견 차이만 확인한 채 돌아섰다. 국민의힘은 진행 중인 수사가 먼저라며 국정조사에 반대했다. 반면 민주당은 다른 야당과 함께 국정조사 요구서를 강행 처리하겠다며 정부 여당을 압박했다. 둘 다 국민은 안중에 없는 볼썽사나운 행태다.
이태원 참사를 둘러싼 정치적 공방 또한 점입가경이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이태원 참사 추모 집회에 조직을 동원했다며 강한 의혹을 제기했다. 정진석 비대위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을 끌어내리기 위해 무더기 버스 동원에 나섰다”며 민주당에 대해 사과를 요구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책임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지는 것”이라며 총리를 포함한 전면적인 국정 쇄신과 국정조사, 특검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당은 야당이 정권 퇴진을 위해 참사를 활용한다고 비난하는 반면 야당은 국정조사와 특검 카드로 맞불을 놓는 형국이다. 정파적 논리에만 매몰된 여의도 정치 현장이다. 진정한 진상 규명 의지는 찾아보기 어렵고 민생도 뒷전이다.
이런 와중에 이태원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문자 메시지까지 공개돼 공방은 한층 뜨겁다. 민주당은 개인 의견일 뿐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문진석 의원과 당직자들이 공유한 내용이어서 파문은 간단치 않다. 해당 글은 희생자 명단과 사진, 프로필, 애틋한 사연을 확보해 추모 공간을 만들자는 내용이다. 선동을 위한 천박한 인식 수준이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국가적 참사를 이용해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며 유가족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며 “정파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민의 눈물까지도 이용하는 잔혹한 정치다. 민주당 관심은 온통 정권 퇴진에 가 있다”며 날을 세웠다. 그러면서 “한국기자협회가 유가족에 대한 2차 피해를 우려해 희생자 보도를 자제하기로 한 것과 반대되는 행태”라고 꼬집었다.
국정조사가 됐든 특검이 됐든 진영논리를 떠나 진상 규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지금처럼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려 한다면 역풍을 각오해야 한다. 우선 정부와 여당은 진정성을 갖고 진상 규명에 주력해야 한다. 꽃 같은 생명을 떠나보내고도 어물쩍 넘기려 해서는 안 된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못한 책임은 무겁다. 일선 현장에서 안일한 대응도 문제지만 왜 대응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근본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책임 소재를 가리고 대응 매뉴얼과 시스템을 정비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국정조사를 거부할 일도 아니다.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 의지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야당 또한 정치적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슬픔에 빠진 유가족과 국민 정서를 헤아린다면 오해 살 언행을 삼가야 한다. 얄팍한 선동과 정권 퇴진 요구는 한국사회 퇴행을 재촉한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연거푸 탄핵된다면 정상 국가는 아니다. 국제사회가 정치적으로 불안한 한국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지 빤하다. 신인도 하락도 물론이다. 완벽한 인간도 완벽한 정권도 없다. 끊임없이 개선하고 보완해 나갈 뿐이다. 하버드대 레비츠키 교수는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 관용과 이해, 그리고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가 있을 때 민주주의는 유지된다고 했다. 삭막한 여의도 정치에 절실한 덕목이다. 상대를 절멸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한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민주주의는 형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레비츠키 교수가 말했듯 서로 인정하고 절제할 때 달성된다. 참사 책임을 축소하려는 움직임도 용납할 수 없지만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선동은 더더욱 용인할 수 없다. 이태원 참사를 명확하게 규명하되 직면한 경제위기 극복에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와 더불어서 민주당은 참사 책임에서 마냥 자유로운지 성찰하는 성숙한 자세가 아쉽다. 비록 집권여당에 책임이 있지만 제1야당으로서 자신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믿는 것인지 묻고 싶다. 설마 그렇다고 믿는다면 이 또한 ‘내로남불’이다. 도산 안창호는 “내게 한 옳음이 있으면 남에게도 한 옳음이 있다. 나도 잘못할 수 있는 동시에 남도 옳을 수 있다”고 했다. 상대에게만 책임을 묻는다면 우리 정치는 아직 멀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경제와 안보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더 이상 분열과 갈등은 안 된다. 이태원 참사 진상 규명과 경제위기 극복 모두 진영과 당파를 초월하는 품격 있는 정치를 기대한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한양대 갈등연구소 전문위원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전북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