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춘 칼럼] 세계 경제 진영화 가속 … 한·일, 이제 협력할 때

2022-11-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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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8) 정성춘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일 관계에 대한 개선 의지가 강해지고 있다. 제20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지난 5월에 발표한 ‘윤석열 정부 110대 국정과제’에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공동이익에 기반한 동아시아 외교 전개’가 포함되어 있으며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셔틀외교 복원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공동의 이익과 가치에 부합하는 한·일 미래 협력관계를 구축할 것을 선언하였다. 과거를 직시하면서 한·일 미래 관계를 포괄적으로 제시한 김대중·오부치 선언 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면서 미래 세대의 열린 교류를 확대시켜 나간다는 것이 핵심 요지다. 그러나 한·일 관계는 여전히 개선되지 못한 채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앞에서 선언한 것과 달리 양국은 여전히 과거만을 직시하고 있을 뿐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하지 못한 채 매번 답답한 논의와 해법 모색에만 골몰해 있다. 그렇다고 뾰족하고 시원한 해법을 찾지도 못한 것 같다. 필자 마음도 갑갑할 뿐이다.

그동안 한국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던 양국 간 경제 관계에도 2010년 전후부터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한국 경제는 일본 경제를 추격하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 기업이 개발한 상품과 기술을 도입하여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기술 발전을 이룩하고 궁극적으로는 일본 기업을 추월하는 성장전략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한참 전 얘기지만 필자가 일본에서 장기간 체류했던 시절 한 지인은 지금 일본에서 유행하고 번성하는 상품이나 비즈니스가 무엇인지를 조사해서 알려 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였다. 그만큼 일본 경제는 한국 경제가 가야 할 하나의 미래상을 제시해 왔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국 간 무역과 투자 거래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의 대외무역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1년 14%에서 2021년 6.7%로 하락하였다. 일본에 진출하였던 삼성과 현대자동차가 실패하였고 한국은 도요타, 혼다 등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무덤이 되었다. 양국 간 무역이 확대될 리 만무하다. 일본의 대한 직접투자도 2012년 45억4000만 달러를 정점으로 2021년 12억1000만 달러로 쪼그라들었다. 일본의 대한 직접투자는 주로 소부장 기업들이 우리나라 대기업에 납품하기 위해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기업의 해외투자가 증가하면서 일본 기업의 이러한 유형의 투자가 위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2019년 7월 일본이 한국에 대해 수출 규제 조치를 실시하면서 양국 간 신뢰가 무너졌고 한국의 소부장 산업 육성정책이 강화되면서 국산화와 자립화가 진행된 것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경제협력에서도 양국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나라들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 왔지만 정작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우면서 무역투자관계가 긴밀한 일본과는 자유무역협정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은 2003년 협상이 개시되었지만 2004년에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종료되었다. 당시 협상을 지켜보았던 필자는 일본의 많은 협상 당사자들이 이 협정을 꼭 성사시키고 싶어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협상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무역역조를 이유로 한 우리나라 산업계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 그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이후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에 관한 논의는 없다. 다만 한·일 간 무역자유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다자무역협정, 즉 RCEP가 2022년 2월에 발효되었고 양국은 이 다자협정을 통해 일부 무역자유화를 도모하였으나 그 수준은 그리 높지 않고 시장 개방 효과도 제한적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양국 간 금융협력은 어떠한가? 이 분야에서도 양국 간 실질적인 협력은 미약하다. 최근 미국의 금리 인상에 따라 국제금융의 안정성 확보가 중요한 정책과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한·일 두 나라 모두 자국 통화가치 하락에 따른 외환시장의 불안정성 증대를 우려하면서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 금리 인상에 추종하여 기준금리를 인상했지만 일본은 이와 정반대로 양적완화 정책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미·일 금리 격차가 확대하면서 엔화 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했지만 일본은행은 금리를 올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를 보면 일본의 재정적자나 경제력 하락을 우려하면서도 여전히 기축통화로서 엔화의 힘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며 한·일 금융협력을 통해 양국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금융협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양국 간 통화스와프는 1998년 50억 달러 수준으로 체결되었으나 2013년 30억 달러 계약을 종료한 이후 재계약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치앙마이이니셔티브하에서 체결되어 있던 100억 달러 통화스와프도 2015년에 종결되었다. 양국 간 국제금융협력은 거의 없는 상태다.

인적 교류도 크게 정체되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의 수준은 양적 그리고 질적으로 양호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석·박사급 유학생은 점차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필자가 근무하는 경제연구기관에서도 일본을 전공하는 박사급 연구자를 찾기 어렵게 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양국 간 상호 이해와 교류를 정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금년에 제정한 경제안보추진법에서는 외국 유학생들에 대해 중요 기술 연구 참여를 제한할 수 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어 혹시 일본의 기술 개발 과정의 개방성이 저하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이는 양국 간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의 교류를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뢰가 회복되지 못하고 우수 인력 교류가 정체되면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는 더욱 요원한 과제일 뿐이다.

그러나 국제정세 변화는 답보 상태인 한·일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는 미·중 간 패권경쟁에 따라 세계경제에서 블록화·진영화가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국은 향후 10년간 중국과의 경쟁에서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를 비치고 있다. 중국 봉쇄를 통해 혁신 역량을 억제하고 미국의 압도적 기술력 우위를 바탕으로 세계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며 이를 위해 이른바 동맹국 규합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만은 미국과 협력할 것을 요구받고 있으며 이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서 14개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특히 중국에 의존적인 공급망을 미국 중심의 공급망으로 재편하여 미국의 경제 안보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한·일 양국은 이러한 재편 과정의 한복판에 서 있다. 일본은 2022년 5월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하여 특정 중요 물자의 공급망을 확보하고 정부 주도로 기술을 개발한다는 방침을 명확히 하였다. 한국도 경제안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략물자의 공급망 관리를 위한 체제 정비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양국은 경제안보 차원에서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2019년의 수출 규제와 같이 상호 불신과 견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신뢰를 회복하고 공급망의 회복탄력성을 높일 수 있도록 양자 및 다자 차원에서 소통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제정세의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양국이 모두 민감하게 여기고 있는 전략물자의 공급망은 더욱 불안해진다. 두 나라 모두 반도체, 배터리, 식량, 에너지, 전략 광물 등 국가경제에 중요한 물자의 안정적 조달망을 구축하는 데 정책적 역량을 모으고 있다. 양자 차원에서는 한·일 경제안보를 협의하는 정부 간 채널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소통에 나서야 한다. 다자 차원에서도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나 칩4 등을 활용하여 공동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소통해야 한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미래의 이익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둘째는 양국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경제적 과제를 안고 있으며 윈윈하기 위한 상호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전환과 관련한 한·일 간 협력은 일본에도 유익할 수 있다. 일본은 디지털 전환을 위해 디지털청을 신설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5G 통신장비시장에서 한·일 협력이나 데이터센터의 한국 유치, 일본 클라우드 시스템 및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한국의 일본 진출 등 협력의 기회는 많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IT인력의 일본 취업 증가는 일본의 디지털 인력난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한 클린에너지 분야에서도 한·일 협력이 필요하다. 특히 에너지 전문가들은 수소자원 확보를 위해 해외에서 대규모 수소 공급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고 여기에 한·일이 협력할 여지가 많다고 주장한다.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한 양국 간 협력도 요구된다. 특히 한국은 GDP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이 매우 높은 국가로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국가다. 전략광물자원 확보를 위한 협력도 필요하다. 디지털 전환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과 상품에는 매우 중요하지만 희소한 광물자원이 필요하다. 이러한 희소 광물자원 확보는 차세대 성장 산업에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국제협력이 절실하다. 일본은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성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學) 경제학연구과 경제학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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