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낡은 '친일타령'으로 핵 게임 이길 수 없다

2022-10-16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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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 교수]

 
 
박근혜 정권 때 주일대사를 지낸 이병기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한·일관계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2013년 7월 도쿄 국제도서전에 참석했을 때였다. “과거의 한·일관계는 위(상층부)는 좋았으나, 아래(민초 수준)는 나빴다. 요즘은 거꾸로다. 위는 안 좋고, 아래는 좋다.” 한·일관계를 이처럼 쉽게 압축 설명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흘렀다. 그의 인식과 진단은 여전히 유효하다. 양국 간 바닥 정서는 우호적이고 활기가 넘친다(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의 기반 위에서 피어난 문화교류와 한류도 한몫 했을 터다). 반면 정부, 정치, 정상(頂上) 수준에선 관계가 더 소원해졌다. 문재인 정권에서 특히 그랬다. 그 사이 윤석열 정권이 들어섰지만 그 여파로 아직 제대로 된 정상회담 한번 못하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최근 한·미·일 3국의 동해 합동훈련에 대해 “일본을 한반도에 끌어들인 것은 자충수, 극단적 친일행위”라고 맹비난했다. “위기를 핑계로 일본을 끌어들이다간 한반도에 욱일기가 다시 걸릴 수 있다”고도 했다. 전에 없이 사나워진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핵 위협 앞에서 다시 ‘친일’을 꺼내든 것이다.
 
물론 북한에 대한 규탄도 빼놓지 않았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미사일을 쏘고 7차 핵실험을 준비 중이라는데,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북의 일체의 행위를 규탄한다”고 했다. 앞뒤가 안 맞는다. 북의 위협이 그렇게 심각하다면 한-미 공조에 더해 한-미-일 3국 공조로 가는 게 더 효과적이다. 그게 상식이다. 같은 당의 정세균 전 국무총리도 “한·미·일 3국간 안보협력이 불가피한 현실이 되고 있다”고 했다.
 
태극기가 일본열도를 뒤덮으면 안 되나?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은 겹친다. 그런대도 일본은 빼라는 얘기는 현실성이 없다. ‘오늘 동해훈련에 일본이 끼게 되면 미래의 한반도에 욱일기가 나부끼게 될 거라’는 논리인데 정체된 낡은 반일(反日) 인식의 소산이다. 이 대표는 거꾸로 이런 생각은 안 해봤나 모르겠다.

첫째,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우리가 싫다고 어디로든 보내버릴 수 있는 이웃이 아니다. 둘째, 중국은 계속 초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셋째, 미국은 언젠가는 우리와 헤어질 수 있다. 동북아의 국제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속단할 수 없다는 얘기다. 욱일기가 나부낄 거라고? 거꾸로 태극기가 일본열도를 뒤덮으면 안 되나.
 
나는 이 대표에게 유럽의 7년 전쟁(1756~1763년)을 심도 있게 연구해보기를 권한다. 어제의 적(敵)이 친구가 되고, 친구가 적이 되는 국제전쟁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대표는 ‘욱일기’ 발언으로 배일(排日)은 했을지 몰라도 미래 지향의 용일(用日)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대표는 ‘욱일기’를 걱정할 게 아니라 북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한 대책을 내놓았어야 했다. 국민의힘은 “이 대표가 심각한 안보위기 상황에서도 친일 선동 노름에만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에 대해선 “고장난 축음기처럼 대화의 테이블로 돌아오라는 소리만 반복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의 핵 보유로 인해 이제 북핵문제는 남북 간 ‘핵 균형’을 유지하는 문제로 성격이 바뀌었다. 핵 균형은 왜 필요한가. 억지(抑止·deterrence)의 균형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북은 핵무기를 가졌고, 우리는 못 가졌다’는 말은 쉽게 풀면 북은 억지력이 있고, 우리는 없거나 부족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 갭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전술핵 재배치, 韓美 입장 달라
 
원론적으로 4가지 방법이 있다. ⓵자체 핵무장 ⓶전술핵 배치 ⓷핵 공유 ⓸확장억지(extended deterrence·핵우산)가 그것이다. 이 중 자체 핵무장은 지금과 같은 NPT(핵확산금지조약) 체제 아래선 어렵다. 미국을 비롯한 기존 핵보유국들이 핵무기 확산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전술핵 배치는 1991년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 때 미국이 가져간 전술핵을 다시 들여오자는 것인데 이 역시 쉽지 않다.
 
전술핵 재배치에 대해선 한·미 양국 전문가들의 생각도 다르다. 박원곤 교수(이화여대)는 12일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에서 “당초 반대에서 지금은 입장이 조금 바뀌었다”면서 “전술핵이 한반도에 와 있고, 주한미군이나 한국군의 전투기를 활용한 투하가 북의 전술핵에 대한 신속한 대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같은 방송에서 유성옥(전 국정원 안보전략원장), 김태우(건양대 교수)도 찬성 입장을 밝혔다. 반면 위성락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본부장(전 이재명후보 선대위 실용외교위원장)은 “필요한 상황이 생길 수 있지만 아직은 그 단계는 아니다”고 했다.
 
미국 측 전문가들은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 13일 6명의 전문가들을 상대로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가 부정적이었다.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전술핵의 수량이 많지 않은데다, 북한의 직접적인 공격에 노출될 위험 때문에 한반도에 배치될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군사분계선 가까이에 미국이 전술핵을 배치하는 상황을 상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 조정관도 ”전술핵 배치 없이도 미국이 보유한 핵무기로 한국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고 했다.
 
확장억지 말고는 다른 대안 없나
 

핵 공유에 대해서도 미측은 부정적이다. 클링너 연구원은 “자체 핵무장, 전술핵배치, 핵 공유 중, 핵 공유가 차악(least bad)”이라면서도 미국이 한국에 핵통제권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다만 “핵무기가 어떤 목표물에 대해 어떻게, 몇 개 사용될지는 한·미 확장억제전략회의(EDSCG)에서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확장억지(핵우산)뿐이다. 미국은 1978년 제11차 한·미 SCM(연례 안보협의회)에서 한국에 대한 핵우산 보장을 천명한 이래 확장억지를 일관되게 유지, 강화해 왔다. 2013년 10월 북의 제3차 핵실험 이후 열린 제45차 SCM에선 이른바 ‘맞춤형 억제전략’(Tailored Deterrence Strategy)에 합의하기도 했다. 미국의 양자 동맹국들 중 이런 억지전략에 합의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미국은 핵무기, 재래식 무기, 미사일 방어를 포함한 모든 역량을 동원해 확장억제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9월에는 EDSCG 논의를 위해 미국을 방문한 신범철 국방차관 일행에게 전략자산인 B-52 전략폭격기에 탑재된 핵탄두를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확장억제를 믿으라는 일종의 현시였다.
 
이쯤 해서 우리는 누구나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그걸로 충분한가. 가짓수가 많은 현란한 비핵억제조치들보다 전술핵 같은 똘똘한 대응수단 하나가 더 절실한 것 아닌가. 억지 논의는 결국 전술핵 재배치 여부로 다시 돌아오고 만다.
 
윤 대통령, “여러 의견 경청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측 당국자들의 말에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부터가 전술핵 재배치에 대해 지난 12일 “우리나라와 미국 조야의 여러 의견을 경청하고 따져보고 있다”고 했다. 조태용 주미대사도 워싱턴 주미대사관 국정감사에서 “확장억지 실행력 강화가 정부의 입장”이라면서도 “북핵이 현실적인 위협이 된 상황발전에 따라 창의적인 해법도 점검해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창의적 해법’이란 표현을 썼다.

우리 사회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아산정책연구원이 작년 9월에 내놓은 ‘한국인의 외교안보 인식 조사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1.3%가 전술핵 재배치에 찬성했다. 독자 핵무장에 대한 지지율은 69.3%였다. 이는 2010년의 55.6%에 비해 월등히 높아진 수치였다. 북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응답은 93.3%. 유사시 ‘한국군 단독으로 북한을 이길 수 없다’는 응답도 67%에 달했다. 달라진 안보의 성격과 수요, 달라진 국민의 인식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윤석열 정부의 최대 과제가 됐다.

북은 앞으로도 고도화된 핵무기를 기반으로 더 공세적으로 나올 게 분명하다. 이근욱 교수(서강대)는 2014년 지역 핵 국가들의 문제를 연구해온 비핀 나랑(Vipin Narang· MIT대) 교수의 이론을 기초로 북의 핵 행보를 예측했다. 결론은 이러했다. “북은 파키스탄과 유사하게, 핵무기 보유 덕분에 만들어진 전략적 공간과 안정성을 악용하여 전술적 도발을 반복하고, 제한적으로 군사력을 사용함으로써 반복적으로 위기가 발생하는 ‘안정-불안정의 역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이 교수는 “한국은 북의 국지도발이 반복될 거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정치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상황이 딱 그렇다. (이근욱, 「비핀 나랑의 현대 핵전략」, 『전략연구』 2014년)
 
억지 경쟁의 핵심은 신뢰다. 상대방이 우리 측의 의도와 결심을 의심하지 않아야 억지력이 생기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핵보유국 북한을 상대로 핵 균형을 이루려면 확장억지든 전술핵 배치든 이게 관건이다. 이재명 대표의 ‘친일국방’ 주장은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핵 게임이 시작됐다.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낡은 ‘친일타령’으로 그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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