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尹의 '담대한 구상'과 햇볕정책의 그늘

2022-08-2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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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논설고문 [극동대 교수]

윤석열 정권은 남북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윤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북한 비핵화를 전제로 북한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담대한 구상’을 제안했다. 식량, 전기, 항만‧공항, 농업, 의료, 금융 지원은 물론 북·미 관계 개선과 재래식 무기 감축까지도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북은 일거에 거부했다. 입에 담기도 어려운 조롱과 막말로 답을 대신했다.
 
1. ‘햇볕 적폐’의 딸 김여정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34)은 “10년 전 이명박 역도가 내들었다가 버림받은 ‘비핵‧개방‧3000’의 복사판에 불과”하다면서 “오늘은 담대한 구상을 하고, 내일은 북침 전쟁 연습을 강행하는 파렴치한 이가 윤석열 그 위인으로, 역시 개는 엄지(어미)든 새끼든 짖어대기 일쑤”라고 조롱했다 “윤석열이란 인간 자체가 싫다”고도 했다.
 
한 세대에 걸쳐 ‘햇볕’이란 이름하에 왜곡·누적되어온 굴종적 대북 정책의 적폐를 한눈에 보는 듯하다. 김여정은 그 적폐가 낳은 딸이다. 그는 과거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도 “미국산 앵무새”라고 했다. 그가 김일성 핏줄이라고는 해도 우리로 치면 통일부 차관급 관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 정권 내내 우리 대통령의 카운트파트라도 되는 양 위세를 부렸다. 막말은 ‘양념’이다.

더는 그런 수모를 당해선 안 된다. 누구는 밸도 없나. 국민이라면 누구나 공분을 느껴야 한다. 국격을 염두에 두지 않은, 시종일관 대북 저자세가 자초한 일이다. 대통령실이 즉각 “무례하다”며 유감을 표하고 나선 것은 만시지탄이다. 이제라도 균형 잡힌 대북 정책을 통해 이런 품격 없는 언행이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2. ‘유연한 상호주의’에 거는 기대
 
윤 대통령의 ‘담대한 구상’에 대해 야당과 좌파 측은 “비핵화를 전제로 삼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북이 비핵화를 수용할 가능성도 없는데 뭐가 이뤄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윤 정부는 북이 비핵화 의지만 보여줘도 초기 협상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주겠다는 입장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먼저 다 비핵화해라. 그럼 우리가 그다음에 한다’는 뜻이 아니다”면서 “의제를 우리가 먼저 저쪽에 줘야 (저쪽의) 답변을 기다릴 수 있고, (그렇게 해야) 의미 있는 회담이나 대화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바꿔 말하면 비핵화와 대북 제재 해제를 엄격한 상호주의가 아닌 ‘유연한 상호주의’ 방식으로 풀어가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핵 합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자원·식량 지원 프로그램 같은 기제가 작동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제재 해제의 칼자루는 미국이 쥐고 있다. 미국을 움직이려면 북·미 간 최소한의 신뢰가 조성돼야 한다. 그게 우리에겐 부담이자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차제에 상호주의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상호주의는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1대1의 엄격한 상호주의만 있는 게 아니다. 현실 속 상호주의는 훨씬 다양하다. 비대칭 상호주의도 많다. 여유 있는 쪽에서 더 많은 것을 주고, 가난한 쪽에선 더 적게 주는 것이다. 좌파가 보수 진영을 공격할 때 동원하는 단골 무기가 상호주의다. ‘상호주의’를 고집해 형편이 어려운 북을 더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선 대부분 ‘비대칭 상호주의’로 북에 도움을 주는 경우가 많다. 보수의 상호주의를 기계적 상호주의로 보는 것은 정확한 인식이 아니다.
 
남북 문제 해결에 ‘교류‧협력’이 큰 역할을 했던 시대가 더는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북이 핵 보유국이 된 후로 그런 인식이 더 강해졌다. 이번에도 일각에선 교류‧협력보다 북 체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 곧 대북 적대시 정책의 철회를 제시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럼에도 교류‧협력이야말로 남북 쌍방 간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손쉬운 방법이다. 적십자사를 통한 이산가족 상봉이나, 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한 식량 지원 방안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3. 북핵, ‘관리’가 더 중요해졌다
 
남북 문제가 구조적으로 어떤 접점을 찾기가 더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북이 핵을 포기할 리 없고, 남은 ‘핵을 보유한 북’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쪽에서든 양보를 하면 좋겠지만 안 한다. 아니, 못한다. 국가와 정권의 존폐가 걸린 일인 데다 미국,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까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북은 1956년 물리학자 30여 명을 소련 드부나 핵 연구소에 파견한 이래 핵 개발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2006년 제1차 핵실험에 성공했고, 지금은 7차 실험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핵기술 고도화와 핵무기 경량화에도 진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북의 핵 개발을 막았어야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대한 책임 문제도 규명되어야 한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의 대가로 북에 준 5억 달러는 북한 경제 규모로 보아 실로 큰돈이었다. 당시 한 재벌그룹 총수는 “1억 달러만 있으면 식량난을 비롯해 북이 직면한 산적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자신이 있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물경 5억 달러가 북에 건네졌다.
 
비핵화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다만, 이 과정에서 ‘상황 관리’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모든 전문가들은 “북이 핵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전쟁만은 안 된다”고 한다. 어떻게 하라는 건가. 상황을 잘 관리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일각에선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지금의 한·미 동맹 체제 아래에선 실현되기 어렵다. 북핵 문제 관리가 새 정부에는 또 하나의 큰 과제인 셈이다. 비핵화가 이뤄지면 좋겠지만 안 되면 튼튼한 관리 체제라도 갖춰야 한다. ‘최선은 차선의 적(敵)’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4. 좌파의 ‘대화 공세’에 대처하는 법

‘안보 딜레마’는 상대 국가의 군비 증강에 불안을 느낀 나라가 자신도 군비 증강에 나서지만 상대방도 다시 군비를 늘림으로써 두 나라 안보가 모두 불안해지는 것을 말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대화 딜레마’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하자니 상대를 믿을 수 없고, 안 하자니 호전적 대결주의자로 몰리는 현상 말이다.

남북 대화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대화에 소극적인 듯 비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우리는 잘 안다. 좌파는 불문곡직하고 ‘대결주의자’로 몰아버린다. “평화에 반대해? 그럼 전쟁하자는 거야?” 같은 단순 무지한 공격으로 그동안 보수는 힘들었고 좌파는 재미를 본 게 사실이다.
 
이산가족 상봉이든, 코로나 방역을 위한 인도적 지원이든 기회만 되면 북과 대화할 의지를 내비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냉전 종식 이후 세계적인 화해 협력 기류에 편승해 남북 대화에 물꼬를 튼 것은 좌파가 아닌 보수 우파였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이 없었더라면 김대중(DJ)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DJ의 최초 통일 방안이 1980년대 중반에 나온 ‘공화국연방제’였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혹독했던 냉전시대 서슬 푸른 군사독재 치하에서 자신의 통일 방안에 ‘연방제’라는 이름을 붙였던 DJ는 이로 인해 극심한 고초를 겪었다. DJ는 결국 1990년대 초 ‘공화국연방제’ 통일 방안을 ‘공화국연합제’로 바꾼다. 그 결정적 계기가 1989년 노태우 정권이 발표한 7‧7선언이었다.
 
북방정책의 시발점이 된 7‧7선언은 ‘남북 관계를 동반자 관계로 규정하고 북한과 미국·일본 등 간 관계 개선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게 골자였다. DJ 측근들은 뒷날 “DJ는 7‧7선언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남북 평화체제 수립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음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통일론을 더 한층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게 된다”고 증언했다. (졸저 <사회통합형대북정책> 나남, 2013년) 좌파의 ‘대화 공세’에 주눅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5. “쇼는 안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선거운동 중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대북 쇼는 안 한다”(1월 24일 공약 발표)고 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북한과 대화는 필요하지만 정상 간 대화나 실무자들의 대화와 협상이 정치적인 쇼가 돼서는 안 되고 실질적인 평화 정착에 유익해야 한다” 백번 맞는 말이다.

다수 국민이 남북 간 대화나 행사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이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두 차례 정상회담을 했고, 이 회담이 또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싱가포르, 하노이)으로 이어짐으로써 화제가 되긴 했다. 그럼에도 주 의제였던 비핵화 문제엔 어떤 성과도 없었다.
 
권위주의 독재와 민주화 시대의 파고를 헤쳐 나오면서 보수나 진보나 남북 문제의 정치적 이용에 관한 한 원죄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이와 결별하겠다고 먼저 선언한 셈이다. 대북정책은 물론 일련의 외교 행사는 현안 논의와는 별개로 정치적·상징적 의미가 있게 마련이고, 이것이 한 나라의 중요한 외교적 자산이 된다. 거품(쇼)은 걷어내고 자산은 늘리겠다는 윤 대통령의 다짐을 주목한다.
 
이재호 (정치학 박사, 극동대 교수, 전 동아일보 논설실장)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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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중동 출신이라 단세포 논리는 그대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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