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국은 최근 나온 몇 가지 연방대법원 판결을 놓고 이를 지지하는 보수와 반대하는 진보 두 쪽으로 갈라져 있다. 뉴욕타임즈는 지난 2일자 1면 톱 기사에서 미국이 보수를 상징하는 붉은 색과 진보를 상징하는 푸른 색으로 갈라져 있다고 보도했다. 이제 미국을 ‘합중국 (the United States)이 아닌 ‘분열국 ( the Disunited Sates)’으로 불러야 할 판이라고 했다. 그만큼 미국이 역상 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분열돼 있음을 가리킨다.
미국을 두 쪽으로 가른 연방대법원 판결 중 대표적인 것이 지날 달 24일 나온 낙태 합법화 폐기 판결이다. 이 판결은 낙태를 합법화한 1973년 판결을 거의 50년만에 정면으로 뒤집었다. 그동안 헌법이 바뀐 것도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판결 근거가 된 헌법은 수정 헌법 제14조 1항이다. 여기에는 미국 시민권자는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생명, 자유,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않으며 법 앞의 평등한 보호를 받는다고 돼 있다. 50년만에 정반대 판결이 나온 이유는 이 14조1항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다.
헌법 조항, 50년만에 정반대로 해석
대법원은 1973년에는 대법관 9명 중 7대2의 다수결로 14조 1항에 ‘사생활의 권리’가 함축돼 있고 이 권리로부터 낙태권이 나온다고 했다. 사생활의 권리란 누구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생활을 할 권리를 말한다. 임신을 계속할 것이냐 중단(낙태)할 것이냐도 사생활이고 따라서 누구나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낙태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낙태권은 헌법 상 인정되는 권리라고 했다.
그런데 지난달 24일에는 대법관 9명 중 5대4의 다수결로 정반대 해석을 했다.대법원은 새뮤얼 알리토 대법관이 작성한 다수 의견문에서 "헌법에는 낙태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그런 권리는 헌법상 어떤 조항에 의해서도 암묵적으로도 보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14조1항에 낙태권이 포함돼 있지 않음은 물론이고 헌법 다른 조항에도 암묵적으로라도 낙태권을 인정하는 언급은 없다는 뜻이다.
1973년 낙태 허용 판결 때도 다수 의견에 반대한 대법관 2명은 헌법에 사생활 권리 조항이 없다는 점을 들어 다수 의견을 비판했다. 바이런 화이트 대법관은 “나는 헌법의 어디에서도 다수 의견을 지지하는 구절을 단 한 개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낙태 허용 판결은 헌법이 연방대법원에 부여한 권한을 넘어도 한참 넘는 것”이라고 했다. 윌리암 렌퀴스트 대법관은 “다수 의견은 사생활의 권리라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그런 권리는 헌법을 설계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권리”라고 했다. 이들의 주장은 낙태 합법화를 폐기한 지난달 24일 판결 논리와 거의 똑같다.
그럼 왜 50년 만에 이렇게 상반된 헌법 해석이 나왔는가?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뉴욕타임즈는 법학 교수들의 연구 결과를 인용해 그 원인을 대법원의 ‘정치화’에서 찾는다. 정치화란 대법관들이 국민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중요 사건의 재판에서 자기를 임명한 대통령의 이념에 따라 판결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를 임명한 대통령이 공화당 소속이면 공화당 노선대로 보수 성향 판결을 하고, 민주당 소속이면 민주당 노선대로 진보 성향 판결을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기를 임명한 대통령의 ‘코드’에 맞춘 코드 판결이 ‘정치화’이다.
과거에는 이런 정치화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진보 성향 판결을 내리고, 민주당 소속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보수 성향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뉴욕타임즈는 미국 두 법학 교수가 이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결과를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중요 쟁점에 대해 진보 성향으로 표결하는 비율이 1950~1980년대까지만 해도 민주당 대통령 임명 대법관과 공화당 대통령 임명 대법관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민주당 임명 대법관은 연구 대상 전체 사건의 47~75%, 공화당 임명 대법관은 30~47%를 진보 성향으로 판결했다.
그런데 1990년 들어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민주당 대통령 임명 대법관은 진보적으로 판결하고 공화당 대통령 임명 대법관은 보수적으로 판결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중요 사건 중 진보 성향 판결 비율이 민주당 임명 대법관은 88~97%나 되는 반면에 공화당 임명 대법관은 14~30%에 불과했다. 민주당 대통령 임명 대법관은 무조건 진보, 공화당 대통령 임명 대법관은 무조건 보수 성향으로 판결하는 양극화가 굳어졌다는 뜻이다.
급기야 지난 달 24일 나온 낙태 합법화 폐기 판결에서는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6명 중 5명은 폐기 찬성, 민주당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3명은 전원 반대 의견을 했다.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중 존 로버츠 대법원장만 반대 쪽에 섰다. 결국 대법관 9명 중 5대 4로 낙태 합법화 폐기 판결이 내려졌다.전통적으로 공화당은 태아 생명권을 존중해 낙태에 반대하고, 민주당은 여성의 선택권을 존중해 낙태에 찬성 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낙태 합법화 폐기에 찬성한 대법관 5명 중 3명이 트럼프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이다. 미국 대법관은 임기가 없는 종신직이다. 본인이 건강 등의 이유로 사퇴하거나 사망해서 공석이 생겨야 후임 대법관을 임명하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 재임 중 대법관 세 자리가 공석이 됐다. 트럼프가 그 자리를 모두 보성 성향 인사로 채운 것이다.
대법원의 정치화는 미국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정치적 양극화의 반영이라는 해석도 있다. 미국은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이 딴 나라 사람들처럼 갈라져 있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은 무조건 지지하고 상대 당은 무조건 반대한다. 트럼프는 자기가 낙선한 2020년 대선을 부정 선거라고 주장한다.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공화당 지지 중 절반을 넘는다는 여론조사도 있다. 물론 민주당 지지자 대부분은 거짓말이라며 믿지 않는다.
미국 연방대법관은 엘리트 법조인 중에서도 엘리트가 선발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에서 누구보다도 존경받고 영예스럽게 여겨지는 자리다. 연방대법관들을 ‘9명의 현자(지혜로운 사람)’로 부르기도 한다. 그동안 연방대법원 판결은 국민들의 깊은 신뢰와 존중을 받아 왔다. 연방대법원 판결을 국민투표에 붙이면 그 판결 그대로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말까지 있다.
그런데 이번 낙태 합법화 폐기 판결은 그렇지가 않았다. 미국 CBS방송이 이 판결 직후인 지난달 24~25일 미국 성인 159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9%가 “대법원 판결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지한다”는 41%였다. 특히 여성은 67%가 반대한다고 답했다. 연방대법원 판결이 여론과 다른 것이다.
대법원이 정치화하면서 갈등과 양극화를 막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촉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법부가 정치화하면 국민은 사법부를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제3의 기관이 아니라 정당과 같은 정치 조직으로 보게 된다. 그러면 사법부 신뢰는 무너지고 만다.지금 미국 대법원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미국이든 어디든 사법부의 정치화는 경계해야 할 임을 미국 사태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