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농 김가진 선생이 1919년 10월 상하이 망명 당시 남긴 시
김가진(金嘉鎭)은 1846년에 태어나 1922년 타계했다. 그의 타계 100주년을 맞아 학술회의와 출판기념회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는 4일 그의 독립운동 활동을 조명하는 추념식을 연다.
독립운동가 최익환(1889∼1959), 박영효(1861∼1939) 등과 함께 조직한 대동단은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혈전이라도 벌이자’는 포고문을 배포하며 국내외 독립 여론을 고취시킨 항일운동 단체다.
1920년 3월 10일 작성한 권고문에는 대동단 김가진 총재를 비롯해 무정부장 박용만, 상무부장 나창헌, 외교부장 손영직, 재무부장 고광원 서명이 올라 있다. 대동단이 군자금을 모집한 정황은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 1920년 3월 1일엔 김가진의 자금모집 편지를 품에 넣었던 목사 김유화가 종로경찰서에 검거됐고, 경성과 전남 일대를 오가면서 재력가들에게 자금을 요청한 신덕영 대동단 조선총지부장이 적발됐다. 김가진 명의로 된 군자금 모집증을 갖고 활동하던 박제웅(박종봉)도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작성된 ‘비밀결사 대동단원 검거 문건’에는 ‘대동단이 김가진을 두령(頭領)으로 갖가지 음모를 기획하고 있다. 이들은 이제 혈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선동적 기고문을 발표했다’는 내용이 있다.
대동단으로 독립운동 유공자 서훈을 받은 이는 현재까지 83명이다. 항일운동 조직 중 최다 인원이다. 하지만 총재인 김가진에 대한 서훈은 올해까지 8번이나 거부됐다. 대동단은 교과서에서도 다루지 않는다. 김가진이 일왕이 수여하는 남작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1910년 한일병탄 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는 일왕 칙명인 조선귀족령에 따라 대한제국 관료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김가진 역시 이때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에서는 “일제에게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를 친일 반민족 행위로 규정한다. 예외 규정도 있다. “다만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 혹은 반납하거나 뒤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 등”이다.
김가진은 남작 작위를 반납하지 않았다. 그간 국가보훈처가 서훈 수여를 거부한 이유다.
그러나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회장인 장명국 내일신문 발행인은 김가진이 고종의 최측근 외교관이자 주일 조선공사였다는 사실이 간과됐다며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친일 낙인으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그는 “주일 조선공사 김가진은 일본 외무대신이나 이토 히로부미 같은 정계 고위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것은 고종의 밀명이기도 했다”며 “그가 작위를 거부하지 못한 이유는 고종의 생명과 안위를 마지막까지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가진 사망 후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거행했다. 독립운동가로서 그의 희생을 인정하고 기린 것이다. 이규수 일본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교수에 따르면 조문객으로는 이동녕, 박은식, 김구, 안창호, 이시영, 조소앙, 홍진, 신익희, 여운형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