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뛰는 책읽기] 장명국 저 '대동단 총재 김가진', 역사적 '옳음'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다
1895년 당시 조선에 머무른 미국인 화가 아놀드 새비지 랜더(Arnold H. Savage-Landor, 1865~1924)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운 좋게 김가진이라는 조선의 거물 정치인과 잘 알고 지냈는데, 실내에서 항상 말총 두건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주기도 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재기가 출중했으며, 내가 만난 수많은 훌륭한 외교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를 쩔쩔매게 할 수는 없었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보다 더 예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대응하는 사람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는 한때 조선의 사절로 일본 막부(幕府)에 파견되었는데, 매우 짧은 시간에 일본어를 완벽하게 숙달했다. 그는 중국어에도 아주 능통했다. 나는 그가 쉽게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는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아주 짧은 시간에 실제로 며칠 내에 영어를 이해하고 읽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의사소통도 했다. 김가진은 다재다능할 뿐만 아니라 대단한 용기와 독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 대부분의 간사하고 모함을 일삼는 관리들은 종종 그가 왕과 마찰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머리가 어깨 위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로운 일이라고 익살맞게 얘기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
- 새비지 랜더 '한국 혹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중에서
이 기록은, 개항기 이땅에 온 외국인의 눈에 비친 김가진에 관한 의미있는 증언이다. 조선 최후의 천재외교관. 그리고 지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 총재, 임시정부에서 추앙받던 정신적 지주이자 대통령 후보. 그의 면모와 활약상은 그러나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김가진은 1995년 독립유공자 발굴 포상이 정부 주도로 바뀐 이후 작년까지 25년간 7차례 서훈을 신청한 바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18년 문재인정부는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포상을 받지 못하는 억울한 사례가 없어야 한다”는 정책 목표를 밝히고 심사기준을 완화한 바 있으나, 그 이후에도 김가진에 대한 평가만은 유독 부정적인 평가 일색으로 요지부동이었다.
신문사 대표인 언론인이 왜 팔을 걷었는가
그의 유족도 아니고 그와의 이해관계가 없는 언론인 장명국(내일신문 발행인)이, 김가진이 총재로 활약했던 대동단의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게 되고 ‘대동단 총재 김가진(석탑출판, 2021)’이란 책까지 출간하게 되는 과정은 인상적이기까지 하다. 역사는 ‘옳음’이 그름을 이겨내 끝내 바로잡는 치열한 분투(奮鬪)의 과정이라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를 근거없이 미화하는 것도 죄악이지만 누군가를 섣부른 프레임으로 낙인 찍은 뒤 자신의 입장을 수호하려 다양한 관점을 돌아보지 않는 일은 더한 해악(害惡)을 낳을 수도 있다. 죄악과 해악을 가늠하는 것은 오직 집요하게 추적된 ‘사실의 힘’ 뿐이다. 책을 읽으며 여러 차례 무릎을 쳤다. 언론인이기에 더욱 냉철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그 안광(眼光)에 포착된 진실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의 삶에 대해 살펴보는 게 필요할 것이다. 그는 서울 종로의 안동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응균, 모친 함안박씨). 1877년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설치되었을 때 유길준과 함께 주사로 임명된다. 갑신정변 이후 40세의 김가진은 마침내 정시 문과에서 병과 15위로 급제하여 홍문관의 정6품 수찬 벼슬을 받는다. 그러나 그해 청나라를 조선에서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는 일에 나섰다가, 위안 스카이의 압박으로 전라도 남원에 유배된다.
이때 그의 과감한 애국충정을 눈여겨본 고종이, 1887년 주일공사관 신설 때 첫 주일공사관 참차관으로 일본에 보낸다. 이후 주일공사가 되고 조선 최초의 재외공관 외교관으로 활약한다. 벼슬을 할 수도 없었던 서얼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뛰어난 역량을 지녔던 김가진은, 국가가 이울어지는 고통스러운 시대를 맞아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날개를 달고 구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한 충직한 외교관이었다.
그가 복벽주의자란 주장은 옳은가
이제 그에게 씌워놓은 무거운 낙인(烙印)의 형틀을 톺아보자.
첫째는 복벽주의(復辟主義)라는 프레임이다. 복벽주의는 왕정(王政)을 회복하는 형식으로 나라를 되찾자는 운동으로, 일제강점 초기에 항일의병과 독립운동 세력들이 외친 강령이다. 유림과 해산당한 군인들이 주를 이뤘던 이들은 대한제국(帝國)의 회복을 목표로 삼았다. 복벽주의는, 이 땅의 정치의식이 근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복벽주의를 버리는 것은 고종이 사망한 1919년이 기점이 된다. 황제의 죽음은, 국가를 지탱하는 근본이 ‘황제’가 아니라, 그 하부의 내실을 이루는 민(民)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복벽주의는, 3.1운동 이후에도 만주 독립운동세력(의군부)에 의해서 표방되기도 한다.
이 사상은 근대화의 반동적(反動的) 탄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김가진이 복벽주의라는 개념에 묶이게 된 것은, 뛰어난 외교관이었던 그가 황제 고종에 대해 보여준 투철한 충성심에서 일차적으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생각을 바닥에 깔아서, 그가 창설한 대동단(大同團)을 의심한다. 이 단체와 김가진이 의친왕 이강의 망명을 시도한 것이 복벽주의의 일단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 성립되려면, 김가진이 의친왕을 임시정부의 황제로 삼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참으로 어이없는 견해다.
김가진은 비밀리에 의친왕에게 서신을 보내, “소인은 지금 상해로 갈 계획이니 전하도 뒤따라오소서(小人今往上海計, 殿下從此枉駕)”라고 설득하였다. 의친왕은 김가진의 권유를 받아들여 망명을 결심하고 임시정부로 친서를 보냈다. “나는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한 일본의 황족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었다.
의친왕의 망명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합법적으로 이양받았다는 논리에 타격을 주고, 임시정부의 주체적 독립성을 부각하기 위한 상징성을 겨냥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김가진은 3.1운동 직후인 9월에 대동단 2차 강령을 발표하는데, 이 강령 속에는 ‘사회주의’란 말이 들어있다. 이 낱말은 서구의 사회주의를 도입하겠다는 의지 천명이기보다는, 황제국가였던 대한제국으로부터 국가체제를 완전히 탈신(脫身)하는 ‘반(反)복벽’의 뚜렷한 선언으로 볼 수 있다. 그런 그가 의친왕을 통해 복벽을 꾀했을 거라는 짐작은, 실상의 맥락에서 너무 빗나가 있다.
지방관이었던 그가 의병 이남규를 순국케 했는가
둘째는 그가 의병탄압을 했다는 의견이다. 고종의 깊은 신뢰를 받았던 그는, 정적들의 표적이 된다. 1895년 박영효 국왕 암살음모사건 때 그는 함께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주체로서 곤경에 처한다. 이때 그는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충남관찰사에 임명된다. 고종은 고을 수령들에게 의병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동농 또한 왕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민종식(독립운동가)이 이끄는 의병이 홍주성(현 충남 홍성)을 탈환한 것은 1906년 5월19일이었다. 일본군 보병 제60연대는 30일 성을 포위했고 다음날 함락시킨다. 5월24일 김가진 관찰사는 홍주성에 주둔한 민종식 부대 300여명의 기세가 높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11월17일 이남규 부자가 체포되었다. 12월20일 민종식이 공주에서 체포되었다. 1907년 1월16일 김가진은 민종식을 평리원으로 압송했고, 그를 숨겨준 이남규와 성우영은 집으로 돌려보냈음을 상부에 보고하고 있다.
1907년 4월27일 김가진은 중추원 찬의로 발령나고 5월13일 신임 충남관찰사가 임명됐다. 5월17일 김가진은 충남재판관에서도 퇴임하여 충남 지방관 관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민종식이 감형되어 유배형 처분을 받은 것은 1907년 7월4일의 일이다. 그리고 이남규 부자가 순국한 때는 1907년 9월26일이다. 김가진이 그해 5월에 이미 충남 지방관 옷을 모두 벗은 상태였기에, 두달 뒤인 민종식의 유배형 처분이나 넉달 뒤인 이남규의 순국과 관련해 명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간 서훈을 판단하는 쪽에서 김가진의 '반역사' 행위의 중요한 증거로 삼고 있는 의병탄압의 골격은 독립운동가인 이남규의 순국과 민종식에 대한 핍박에 김가진이 가담했다는 혐의였다. 그런데, 그 혐의는 날짜의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검증되어 있지 않은 피상적인 접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충남관찰사가 의병을 검거하라는 왕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외세의 압박 때문에 동족을 죽이는 일에 병력을 쓰지 않기 위해 고심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남규 부자가 순국하던 9월26일에는 김가진은 충남관찰사가 아니었다. 넉달전인 5월17일 이미 이곳을 떠난 뒤였다. 이남규 지사의 순국에 관찰사 김가진이 가담했다는 식의 비판은, 정확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다. 더구나 심정적으로나 정황적으로만 살펴 독립운동가를 죽인 관료였다는 프레임은, 당시의 관료 전부를 매도할 수 있는 선정적인 지목(指目)에 가깝다.
작위 반납을 하지 않은 건, 외교관의 입장 감안 필요
셋째는 친일 혐의다. 이것이 가장 문제적인 비판일 것이다. 우선 ‘작위 문제’부터 살펴보자. 1910년 한일병탄 조약이 체결되자 일제는 천황의 칙명인 조선귀족령에 따라 대한제국 관료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한다. 김가진은 남작 작위를 받는다. 일제 강점기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호에서는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행위”를 친일 반민족 행위로 규정한다. 단서로 “다만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작위를 거부 혹은 반납하거나 뒤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 등”은 예외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작위를 반납하지 않았다. 같은 일을 당한 사람 중에 작위를 거부한 경우도 있었기에 김가진의 침묵을 묵시적 동의로 해석하게 된다. 당시 신문에는 그의 행적이 소개되면서 이름 뒤에는 남작이란 칭호가 붙여졌다. 작위를 거부하지 않은 행위 자체의 ‘친일’은 물리칠 수 없는 비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당시 황제인 고종의 뜻을 따르고 '결과적인 국익'을 생각하는 투철한 외교관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작위를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못한 것에는 그의 '직업적 특성'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또 김가진은 작위와 함께 부여된 은사금을 취한 자취가 없다. 최소한 일제에 돈으로 매수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이 사안의 경우도 심증만 가지고 그가 돈을 챙겼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뚜렷한 증거가 없는 경우를 두고 속단하는 것은, 선입견이 작동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김가진은 9년 뒤 그 ‘작위’를 받은 사람으로, 임시정부의 독립활동에 가세함으로써 그의 선택이 '친일'의 방편이 아니었음을 확인해준 바 되었다. 그의 ‘작위 친일’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아니면 이후에 전개된 그의 애국적 결단에 눈길을 둘 것인가. “사람을 보려면 그 끝을 봐야 한다”는 속담은, 이런 경우 강렬한 의미를 발산한다. 선과후공(先過後功)이라면, 그는 독립운동가로 읽힘이 마땅하다.
김가진이 이토를 조롱한 시를 오독한 뒷사람들
또 하나는 ‘친일시 논란’이다. 1908년 5월 이토 히로부미의 67회 생일에 김가진은 축시를 쓴다. 유림 어용단체가 발행하는 잡지에 그가 작심하고 올린 시는 무엇일까.
大局籌深東亞勢(대국주심동아세)
隣邦義重赤關盟(연방의중적관맹)
賀公六十七年壽(하공육십칠년수)
老圃黃花月正盈(노포황화월정영)
통 크게 동아시아 세력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이웃나라 의리 중하여 청일조약 맺었구료
선생이 67세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묵은 밭에 국화가 피니 달이 꽉 찼습니다
동농 김가진의 '이토에게-시중춘색창환수(시 속에 '봄빛' 읊은 것에 대한 답가)'
을사조약, 헤이그밀사, 고종 퇴위로 조선이 참담한 지경에 빠지는 1908년에 침략 원흉에게 생일 축시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혈압이 그냥 올랐을 것이다. 김가진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이토에게 아부를 했단 말인가.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최소한 ‘답가’를 부르게 한 이토의 ‘노래’를 찾아서 따져봐야 마땅하다.
앞 연의 두 번째 행에 있는 '적관맹'은 청일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해 1895년 청나라와 일본이 시모노세키에서 체결한 강화조약이다. 적관(赤關)은 시모노세키(下關)와 같은 뜻이다. 이 조약은, 조선을 청나라에서 독립시켰지만 사실상 일본이 조선을 삼키기 위해 일단 자유로운 상태로 만들어놓은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이토가 한 짓이다. 17년에 그는 외교관 김가진에게 뭐라고 읊었던가.
解紛不用干弋力(해분불용간과력)
談笑之間又證盟(담소지간우증맹)
갈등은 무력으로 풀지 않으니
웃으며 대화하는 사이 동맹이 절로 입증되리
이토, 총칼 안쓰고 대화한다더니 거짓이었구려
조선과 총칼 안쓰고 대화한다더니, 청나라와 조약 맺는 꼴을 보니 그때 한 말이 거짓이었구려. 이렇게 따지고 있는 것이다. 묵은 밭에 국화가 피니 달이 꼭 찼다는 말은, “그때 그 시로 한 말씀이 이제 꽃으로 활짝 피어 권력도 정점이 되었구려.”란 의미다. 이제 그 권력으로 이웃과의 대화를 이끌 수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다. 이토의 변심을 따지는 대목이다. 1889년 이토가 쓴 시와 1908년 김가진이 쓴 화답시를 비교해서 꼼꼼히 읽어보면, 김가진이 얼마나 호기롭게 식민지 권력자 이토를 조롱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토 또한 이 시를 읽고 뜨끔했을 수 밖에 없었을 만한 공격이다. 이런 시를, 후세의 경솔과 무지로 ‘친일시’로 치부하는 것은 낯이 후끈해질 수 밖에 없는 풍경이다.
그가 외교적인 입장에서 일본과의 소통을 중시했다는 수준에서의 친일을 제외하면, 그의 삶을 관통하는 많은 선택과 행위들이 구국적인 충의(忠義)와 독립에의 열망에서 나온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대동단 활동과 말년에 노구를 이끌고 찾아간 임정 합류, 청, 중, 러의 틈바구니 속에서 국익을 위해 사력을 다해 뛰던 외교관, 파란만장한 시절의 목민관의 고뇌. 이 모두가 그 호흡을 담고 있다. 1920년 12월20일 상하이에서 김가진이 임정에 돈을 보내준 서울 친척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차마 죽지 못하고 죽기로 맹세한 것은 오직 나라의 광복을 위한 사업에 큰 활동을 하는 것 뿐입니다. 이외에 따로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늙고 쇠약해지는 것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2019년 이만열, 윤경로, 박찬승 등은 김가진 서훈에 관련된 의견서를 냈다. “김가진이 서거했을 때, 그가 정녕 일제 작위를 받았다는 불명예를 씻지 못한 친일파였다면 독립운동에 헌신한 기라성같은 혁명가들이 어찌 자기 발로 찾아와 머리를 숙였겠는가.” 백범 김구가 서훈 보류 사태를 보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김가진의 친일행위가 그의 독립운동을 덮을 정도였다면, 어떻게 동시대인들에게 김가진 명의로 독립운동 자금을 내라는 권고문이 배포될 수 있었을까?
1993년, 상하이 홍교로(虹橋路)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묻혀 있던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규 등 독립투사 5인의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묘지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들과 나란히 묻혀있던 김가진의 유해는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동농은 중국에, 아들 김의한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며느리 정정화는 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다. 그의 독립충혼을 이렇게 가족들과 찢어놓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93세의 후동(厚東, 김자동 임정기념사업회장의 아명, 김가진의 손자)이 오래 홀대받은 고혼(孤魂)의 귀환을 목타게 기다리는 지금 이 시간은 너무 가혹하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