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해 선생님과 인연은 1974년 당시 동아방송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하시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저는 제9대 국회에서 비서관으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광화문 선술집에서 처음 만났고, 소박한 만남이었지요.
그 시대엔 먹고살기도 힘들고 일자리도 없을 때였습니다. 특히 대중문화 예술인들의 사정은 무척 어려웠습니다. TV가 없었던 때라 방송 스타는 거의 없었지요. 그날 이후 간간이 뵈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연예계 선후배들의 동정을 안줏거리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지요. 북한에서 홀로 자유를 찾아오신 분답게 실향민 소식도 주시곤 했지요.
1987년 사랑하는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삶의 의욕을 잃은 채 방황하실 땐, 이대로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송해 선생님은 1988년 5월 KBS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로 등장하시며 한국 연예계의 새 역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폭발적 사랑을 한 몸에 받으셨지요.
1986년 당시 전북 임실군 관촌 인근에 '4명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전설'이 서린 사선대를 향토 문화재로 지정하고, 사선 문화제를 시작할 때는 전국노래자랑 '사선 문화제 임실군' 편을 제작하는 데 앞장서셨습니다.
미국과 유럽 등지의 국외 교포들에게는 나라 사랑과 고향 사랑의 불을 붙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민선 지방자치 시대가 아니어서 지역 축제도 별로 없었던 터라, 농촌지역의 최고의 농민 위로공연이자 축제로 자리매김했지요.
세월이 흘러 2019년 12월 말경, 선생님은 김진일 회장과 저를 종로 단골 양복점에 데려가선 "그간 마음으로 고마웠다"며 양복을 강제로 맞춰 주셨습니다. 또 부인 석옥이 여사가 떠난 후 독감이 심해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었지요.
조준희 기업은행장과 최영훈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함께 독한 소주만 드셨던 일도 기억납니다. 선생님은 조 행장이나 최 국장이 청하면 늘 마다하지 않고 흘러간 트로트 한 곡을 구성지게 뽑아 분위기를 살리셨지요. 송해 선생님과 보낸 따뜻한 추억은 너무도 많아 필설로는 다 소개할 수가 없네요.
식당에 가실 때면 주방식구들은 물론, 서빙 직원들에게까지도 빠짐 없이 지갑을 열고 용돈을 주신 그 인자한 자비의 천사이시고 후배들이 타계하면 누구보다 먼저 조문을 가 "못된 놈, 나이도 어리면서 나보다 먼저 가다니..."라며 영정을 어루만진 따듯한 가슴을 지니셨습니다.
얼마 전엔 "소화가 안 되고 소변 조절이 힘드시다"며 토로하기도 하셨고, 증여세와 양도소득세에 대해서도 걱정하시더이다. 그때 저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툭 터놓고 말씀하시라고 권했지요. 송해재단을 만들어 사회에 이바지하는 방안을 협의하기까지 했는데, 갑자기 하늘의 부름으로 떠나셨습니다.
"코로나19가 날 가두었다. 이렇게 야위어 국민 앞에 설 수가 없다"며 전국노래자랑 제작진에게 하직 인사를 통보하신다기에 저는 굳이 말렸지요. "선생님, 용기를 가지고 다시 무대에 서시라"고요.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전화하셔서 "시청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숙연하게 하신 말씀이 귓전에 쟁쟁합니다.
송해 선생님은 진정 대한민국의 큰 어른, 거인이셨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 국민의 사랑을 받아오신 송해 선생님!
대구 달성군 옥표송해공원 하관식에 한 줌 재로 화하신 선생님의 몸을 도자기관에 담아 묻고 이승과 이별의 흙을 뿌리며 돌아선 저는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세 번 곡을 하며 장례위원장 엄영수, 종로상인회장 이상희와 서로 부둥켜안은 채 통곡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이 지구별이 존재하는 한, 선생님의 발자취와 역사는 지구촌 서민들의 희로애락과 함께 살아 숨 쉴 것입니다. 취임사는 꿈으로 쓰고, 퇴임사는 발자취로 쓴다고 합니다. '영원한 현역'으로 살아오신 송해 선생님은 현역에서 퇴임해 하늘의 별이 되기까지 마이크를 놓은 적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송해 선생님.
삼가 옷깃을 여미며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하늘나라에서 후배들이 진행할 KBS 전국노래자랑을 들으시며 영면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