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디지털 세계를 떠받치는 기술과 데이터를 통제하는 능력인 '디지털 주권'을 강화하려면 유럽 주요국을 본받아 '오픈소스 소프트웨어(SW)'의 개발과 도입을 정책적으로 활성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오픈소스SW는 저작권자가 아닌 타인에게 '소스코드(source code) 사용·수정·배포'를 허용하는 SW로, 일반 저작권법상 이런 행위를 금지하는 상업용SW와 구별된다.
28일 국책연구기관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SPRI)의 '유럽 공개SW 정책 분석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연합(EU)은 작년 10월 글로벌 경제에 대비한 포용적 디지털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오픈소스SW 전략(2020~2023)'을 발표했다. 주요 회원국은 오픈소스SW 활성화를 위한 '오픈소스프로그램사무국(OSPO)' 설치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가별 추진체계·연구혁신 기반 조성에 나섰다.
이미 유럽 주요국은 디지털 주권을 강화할 방안으로 수년 전부터 디지털전환 국가전략에 오픈소스SW 활성화 정책을 반영해 왔다. 영국과 그리스는 '오픈소스SW 개발 가이드(2017년)'와 '아테네 디지털 로드맵(2018년)' 등 정부 차원의 디지털정책과 연계한 전략을 발표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디지털공화국법(2016년)'과 '디지털행정법(2005년)'으로 오픈소스SW 활성화 정책을 법제화했다.
가시적인 성과도 나왔다. 스페인 사라고사에선 업무용 PC 1200대의 운영체제(OS)를 자체 개발한 'AZLinux'로 대체하고 2015년 기준으로 나머지 1800대 PC의 업무용 프로그램을 '오픈오피스'로 전환하는 등 2005년부터 3000여대의 데스크톱PC 환경을 오픈소스SW 기반으로 바꿨다. 프랑스에선 2002년부터 파리시의 지원으로 개발해 온 콘텐츠관리시스템(CMS) 'Lutece'의 7번째 버전을 올해 배포했고 헝가리·미국 등 해외에도 보급하고 있다.
모두가 성과를 거둔 건 아니다. 독일 외무부는 과거 정보화예산 절감을 위해 리눅스 전환을 추진했다가, 지난 2011년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OS 기반으로 회귀했고, 뮌헨 지방정부는 우리 행안부의 개방형OS 사업과 유사한 'LiMux'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2017년 비용절감 효과에 대한 의문이 제기돼 윈도 OS로 재전환했다가 작년 이를 번복하고 다시 오픈소스SW 도입을 선언했다. 그리스 칼라마리아 지방정부는 2013년 오픈소스SW '리브레오피스' 전환 후 호환성 문제로 MS오피스를 재구매했다.
SPRI의 보고서는 "오픈소스SW에 대한 정부의 비전 설정, 장기적인 전략 수립과 법제화를 통해 정부 정책의 안정적·지속적 추진 기반 조성이 필요하다"라며 "전략 없이 단기적 비용 절감만을 위해 성급하게 추진된 오픈소스SW 전환은 동력을 잃거나 기존의 상용SW로 회귀하는 등 성과 창출이 미미"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디지털전환 가속화를 위해 국가 정책 연계 및 지역확산 측면에서의 방안 논의도 필요하다"라며 "기술혁신을 위해 국가연구개발 과정에서의 오픈소스SW 활용 기반과 제도적 개선책 마련이 요구된다"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오픈소스SW 역량을 강화해 디지털 주권을 확보한다면 이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더욱 커진 빅테크 기업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단이 될 수 있다. 각국은 소수의 빅테크 기업이 국경을 넘나드는 거래와 사업 활동으로 다수 이용자의 디지털 제품·서비스의 운명을 좌우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공익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관련 규제가 마련돼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지난 3월 독일·덴마크·핀란드·에스토니아 등 EU 주요국 정상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에게 보낸 공동서한을 통해 디지털 주권 확보를 촉구했다. 이는 위원장이 발표한 EU 집행위원회의 핵심 의제(2019~2024) 중 '기술적 자주권'을 보완하는 메시지였다. 이번 SPRI 보고서는 EU 차원의 디지털전략에서 진정한 디지털 전환을 위해 강조되는 공동창작·개방성 등이 오픈소스SW의 특성과 부합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