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전환’의 일등공신 검찰
대장동 개발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의 중간수사 결과는 특검의 불가피성을 거듭 확인해준다. 이재명 후보는 22일 즉각 “저는 특검에 동의한다. 화천대유 비리의 일부인 (부산)저축은행 대출비리 묵인사건에 대한 특검을 피한다면 윤석열과 국민의힘이 바로 범인”이라고 치고 나왔다. 과연 ‘프레임 전환’의 고수다. 특검 요구에 시종 끌려 다니더니 일거에 상황을 뒤바꿔놓았다. 이제 자신은 특검을 요구하는 자, 윤 후보와 국민의힘은 특검을 피하는 자가 됐다. 이런 반전(反轉)의 결정적 계기를 검찰 수사가 만들어 준 셈이다.
국민의힘은 “역시 이 후보에 대한 방탄수사이자, 꼬리 자르기 수사였다”면서 “이 후보가 윤 후보의 검사 시절 부실수사 의혹을 제기하며 이를 특검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수사의 초점을 대장동 비리 규명에서 윤 후보에게 돌리려는 것”이라고 맞받기는 했다. 객관적으로 두 사건을 동렬에 놓을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대장동은 부동산 전문가도 아닌 일개 법조 출입기자가 반(半) 공영에 발을 디디고 일주일 만에 회사를 차려서 천문학적인 수익기반을 창출한 사건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그 과정에서 당시 성남 시장이던 이 후보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에 대한 의문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 특검을 해야 하나 특검은 물 건너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2월 예산국회에 ‘특검국회’ 소집?
여야 간 특검 협의가 순조롭게 진행되더라도 내년 1월 말에나 특검 수사가 시작될 수 있을 거라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그렇다면 대선(3월 9일)까지 고작 한달 정도 수사할 수 있다. 한달 수사로 뭘 밝힐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욱이 공직선거법 상 내년 2월 13일 후보 등록 후엔 대선 후보에 대한 체포 및 구속 등도 제한된다. 자당(自黨) 대선후보의 대장동 의혹으로 ‘특검 대선’을 초래한 민주당이 특검을 서둘러야 옳지만 그럴 기미조차 없다. 대장동 게이트가 선거에 미칠 영향을 차단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이 후보가 특검을 수용한 배경을 놓고서도 “지지율이 30%대 초반의 박스권에 갇혀 있어서 출구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지적들이 많다. “시간상으로 지금쯤 특검에 동의해도 수사 기간이 촉박해 어떤 의미 있는 결과도 나오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 작용했을 거”라는 시각도 있다. 이런 인식, 또는 오해를 불식하려면 민주당부터 특검에 더 적극적인 자세로 나와야 한다. 대장동 개발이 “단군 이래 최대의 치적”이라면서 그 앞에서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
여야는 특검법 특검(개별특검)으로 갈지, 상설특검으로 갈지 협의하고, 특별검사 추천방식과 수사 범위 및 대상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한다. 이런 절차가 12월에는 끝나야 1월 말쯤 특검이 출범할 수 있다. 그런데 12월 국회는 예산국회다. 예산 따내기 경쟁이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인다. 내년엔 지방선거(6월 1일)까지 있다. 과연 여야가 원만하게 새해예산안을 법정시한(12월 2일) 내에 처리하고, 특검법 제정을 위한 임시국회도 소집할 수 있을까.
여야는 특검 방식을 놓고서도 생각이 다르다. 민주당은 상설특검을, 국민의 힘은 개별특검을 각각 원한다. 상설특검은 특검 추천권한을 여야가 나눠 갖게 돼 있어서 민주당이 반대하면 특검 추천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면 국민의힘이 이미 제출해놓은 개별 특검 법안에 따르면 특검 추천 1차 권한을 대한변협에 주도록 돼있어서 국민의힘에 보다 유리하다고 한다.
수사 대상과 범위에 대해서도 입장이 다르다. 국민의힘은 ‘쌍 특검’과 ‘교차특검’을 주장한다. 대장동과 고발사주 의혹을 별도의 특검으로 동시에 다루되 대장동 특검의 추천권은 국민의힘이, 고발사주 추천권은 민주당이 갖자는 것이다.
핵심은 대장동 게이트의 실체 규명
양측은 진실 규명보다는 어떻게 하면 ‘특검 공세’로 상대방에 타격을 주느냐, 상대의 공격을 어떤 ‘물 타기’로 막아내느냐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그런 특검이라면 성사가 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럴 바엔 지금의 특검 논의는 그만 접고, 이(李)든, 윤(尹)이든, 당선되면 곧바로 제대로 된 특검을 하겠다고 제1공약으로 제시하고 실행하는 편이 낫다. 수사(修辭)에 그칠 ‘선(先) 특검, 후(後) 대선’이 아닌, 실질적인 ‘선 대선, 후 특검’으로 가자는 얘기다. 지금 언급되는 수준의 특검 추진은 우리 정치문화의 관성(慣性)으로 미루어 선거만 끝나면 유야무야 될 개연성이 매우 높다. 용두사미, 겨우 그런 결말을 보려고 나라가 온통 이 난리를 벌였나.
‘대선 후 특검’은 상대적으로 수사의 공정성, 독립성을 담보할 수 있다. 설령 대통령 당선자나, 새 집권세력이 수사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문재인 정권 말기, 레임덕 대통령 아래서 시간에 쫓기면서 하게 될 불과 한달여의 특검과 견줄 수 있겠는가. 새 정부 아래에선 특검 수사가 지나치게 가혹해질 수 있음을 오히려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특검(상설특검)에 주어질 최장 90일(60일+30일)의 활동기간은 한국정치와 선거. 그리고 사회를 차분하게 톺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대선 후, 특검’과 ‘오징어 게임’
두 후보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 후보 자신부터 그동안 대장동 의혹에 대해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올 거”라고 누차 확언하지 않았는가. “보수 토건세력인 국민의힘에 맞서 공공의 이익을 지켜냈다”고도 했다. 시청 청사 화장실에 ‘부패 지옥, 청렴 천국’이라는 표어까지 붙여놓고 늘 부하 직원들에 삼가고 또 삼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로서는 ‘대선 후, 특검’ 공약이 오히려 자신의 결백과 용기를 보여줄 기회가 될 터이다.
윤 후보도 ‘대선 후, 특검’을 피할 이유가 없다. 누구든 선거에서 이긴 사람은, ‘내란 또는 외환이 아니고선 대통령은 재직 중 형사소추를 받지 않는다’는 헌법 제84조에 따라 특검 대상에서 제외된다. 반면 낙선자는 특검의 칼날을 온몸으로 받아야 한다. 바야흐로 죽느냐, 사느냐의 제로섬 게임(zero some game), 요즘 유행어로 ‘오징어 게임’이 벌어질 판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대장동 의혹에 대한 국민의 공분(公憤)을 한번 생각해보라. 양측 모두 거짓은 반드시 단죄되어야 한다는 각오로 나서야 한다.
검찰권을 행정부에 둔 이유
차제에 ‘사법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자. 사법, 또는 준(準)사법이 정치의 영역에 과도하게 들어오는,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는 자제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선진국들도 검찰권을 준사법권으로 간주하면서도 사법부에 두지 않고 행정부에 두고 있다. 검찰권은 국정의 일관성과 효율성이 크게 훼손되거나 방해받을 경우에만 소환되는 것이 옳다.
문재인 정권에선 ‘사법’이 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비판이 유독 잦았다. 새만금, 4대강, 탈원전, 세월호 등 많은 분야가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됐다. 사법이 정치에 과도하게 개입하게 되면 국정운영에 단절이 생긴다. 기본적으로 사법은 다른 영역의 뒤를 따라가거나, 가야 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흔히 ‘헌 칼’이라고 하지 않는가. 앞서가는 국정을 ‘헌 칼’로 재단하기 시작하면 국가의 영속성과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5년 단임제에선 거의 치명적이다.
‘특검 대선’, 사법과 정치의 거리두기 실패
이명박 정부 때의 ‘녹색성장’과 4대강 사업이, 박근혜 정부 때의 한일(韓日) 위안부 합의가 다음 정권에서 부정되고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은 좋은 예다.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도 그럴 운명에 처해있다. 5년 정권이 전(前) 정권의 정책이나 사업을 문제 삼아 사법의 심판대에 세우게 되면 결론이 날 때까지 보통 2∽3년이 걸린다. 국가발전에 투입해야 할 귀중한 시간 자원의 절반 이상을 ‘과거’를 치우는 데 소모해버리는 셈이다.
김대중(DJ) 대통령이 잘한 일 중의 하나가 그런 폐단에 빠지지 않았다는 거다. DJ는 과거를 묻지 않았고, 동서(東西)를 나누지 않았다. DJ가 1998년 10월 당시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일본 총리와 함께 채택한 ‘김대중-오부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지금도 미래 지향적 한·일관계의 규범이 되고 있다.
정치와 사법은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한다. 평생 검사만 한 검찰총장을 정치판에 불러낸 것도, 이번 대선이 전례 없는 비호감 대선에, 특검 대선으로 변질된 것도 정치와 사법이 거리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