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칼럼] 어른의 삶?

2021-09-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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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고려대 융합경영학부 교수]



어렸을 적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설날 떡국을 먹으면 한살이 늘어난다는 말에 몇 그릇이나 한번에 먹었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왜 어른이 되고 싶다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나 하는 마음도 없진 않지만, 그때의 어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내 맘대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때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난 지금 되돌아보면 어른이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바쁜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한 적이 없다. 솔직히 어렸을 적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나? 아니면, 언제부터 어른이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어른이 된 이후로 신경 쓸 일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며칠 전 만난 동네 꼬마아이와의 일이 있기 전까지 어른의 삶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어스름한 저녁, 분리수거를 위해 나가던 길에 무심히 앉아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학생이었다. 늦은 시간 혼자 심각히 앉아 있는 모습에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하였다. 무슨 일 있니? 라는 의례적 질문에 아이의 대답은 의외의 질문으로 응수하였다.
"아저씨, 어른도 삶이 공허해요?"

깜짝 놀란 나는 그 이유를 물었다. 사실은 아이에게 ‘공허(空虛)’란 말을 아니? 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 아이의 눈에는 무엇인가 즐거움이나 기쁨과 같은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꿈과 희망을 다 잃은 표정이었기에 정작 물어보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걱정과 달리 정작 아이의 대답은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고민이 얼마나 의미없는 것인지 알 수 있을 만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공허’라는 단어에 꽂혀 그 아이의 물음에 대한 답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선가 엄마가 부르자 급히 일어나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잠깐의 만남이지만 어른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무래도 우리 때보다 훨씬 조숙한 요즘 아이들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 중 하나가 ‘현생(現生)’이란 말이다. 종교적 의미보다는 주로 부정적 의미로 이번 생에서는 하지 못하지만, 다음 생에서는 새로운 삶을 기대해 보겠다는 투의 이야기를 할 때 주로 사용한다. 요즘 학생들이 주로 보는 웹툰이나 웹소설에 이러한 환생이나 게임과 같은 가상현실 속 캐릭터 등을 다룬 주제의 이야기가 많다는 것도 그 원인이 될 수 있지만, 현재의 불안하고 외로운 그들 마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어른이 된 나 역시 살아온 인생의 갈림길에서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예전 이휘재씨가 출연했던 인생극장처럼 말이다. 우리의 녹록지 않은 현실이 그때 가보지 못한 삶을 미화 하거나 더욱 궁금해 하는 것일 터이다.

혹시 예전에 유행했던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 두 번째 삶)이란 게임을 기억하는가? 2003년 시작된 가상 세계 게임으로 나이 제한이 있기는 했지만, 현재와는 달리 내가 원하던 모습의 아바타를 통해 두 번째 삶을 즐기는 게임이었다. 그렇기에 아바타라는 가상 세계 속의 ‘나’는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들이었다. 키도 크고 건강하고 날씬하며, 현실에서는 하기 어려운 문신이나 거친 바이크를 몰기도 하며 개인의 자유를 느꼈다.

이 게임은 단순히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RPG(Role-Playing Game)와는 확연히 달랐다. 세컨드라이프는 당시 3D 물체를 제작하는 도구를 갖추었으며, 플레이어는 건물이나 가구, 의상 등의 오브젝트라 불리는 아이템들을 만들고 게임세계에서 거래할 수 있다. 당시 18살 미국의 고등학생은 세컨드라이프에서 부동산과 가구제작을 통해 그의 부모보다 많은 연봉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게임의 특징이 린든머니라는 가상세계의 화폐를 통해 실제 현실처럼 경제행위를 할 수 있었고, 게임 속 린든머니는 현금(달러)으로 교환이 되었기 때문에 게임이 아닌 진짜 삶과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특징들이 게임이라는 규제에 막히면서 대중적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전세계는 메타버스(metaverse) 열풍이 불었다. 메타버스는 가공,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과거 세컨드라이프의 확산을 막았던 우리 정부는 한국판 뉴딜 2.0을 발표하면서 핵심과제로 메타버스를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피력하며 가상과 현실이 융복합된 디지털 세계가 다시 펼쳐지고 있다. 제페토, 로블록스, 포트나이트와 같은 게임을 비롯해 페이스북 등 전방위적으로 메타버스가 확산되고 있지만, 그 이름은 아직 생소하다.

코로나로 인해 현실세계의 인간관계 상실은 메타버스와 같은 3차원 가상세계를 통한 새로운 세계로의 변화를 유발하고 있다. 오죽하면 에스파(asepa)라는 걸그룹은 아티스트의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아바타와 함께 현실과 가상의 공간 사이의 새로운 세계를 통해 교감한다는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얼핏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과거 세컨드라이프가 그랬듯, 채워지지 않는 삶의 허망함과 가보지 못한 삶에 대한 바람은 정부가 발벗고 나서지 않아도 우리를 다시 가상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하지만, 가상세계가 현실이 될 수는 없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어른의 삶에 대한 허망감을 묻는 아이의 질문은 전에 없던 큰 고민을 가져왔다. 아무래도 학교에 있다 보니 어린 학생들의 학업 외적인 고민 상담을 많이 한다. 술도 한잔 하고 하면서 ‘라떼는 말이야’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물론 지금도 자주 하지만, 요즘은 아차 하며 말을 머뭇거리게 되었다. 꼰대처럼 보이지 않으려 읽었던 인터넷에 유행하는 테스트와 예방법에 꼰대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나를 어찌 바라보는가’의 관점이 아닌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기에 상대를 어리다고 무시하기보다는 타인의 의견이나 방식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요즘과 같이 인간관계의 상실은 예전과는 다른 일상화된 지루함 속에 서 있는 것 같은 답답한 느낌을 들게 한다. 인터넷 초기, 복면가왕의 마스크가 제공하는 익명성처럼, 가면 뒤 오직 나의 능력과 실력만을 봐줄 것 같은 기분, 나의 부끄러운 부분을 알 수 없는 가상현실에서의 나의 모습을 통해 위안과 희망을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생각해 보면, 아이의 공허함은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들이 가상세계에서만 꿈을 꾸지 않도록 어른의 경험에서 이들의 어려움에 대한 이해와 응원이 필요하다. 어른은 단지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며, 이들의 현실에서의 고통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 속 문득, 비대면이 장기화되면서 동네의 아이들과 마주치는 일도 드물어졌기에 길에 앉아있는 아이에게 눈이 간 것이 아닐까? 또한 아마 그 아이에게도 학교나 학원 선생님과 부모님을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술의 발달에 따른 가상현실도 좋지만, 이들이 현실에서도 행복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 것, 이것이 어른의 삶이 아닐까? 당연했던 일상이 소소한 행복으로 느껴지는 요즘, 당연한 듯, 믿고 따를 수 있는 어른을 꿈꿔본다.


 

김재영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경영정보학과 ▷고려대 경영학 박사 ▷한국정보시스템학회 이사 ▷4단계 BK21 융합표준전문인력 교육연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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