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8사단 제1포병대대장으로 6·25전쟁 당시 강원도 송계리전투에서 북한 인민군 사살 2199명, 포로 612명, 무기 노획 1만9389점 등 전과를 올린 우경(宇畊) 장경석 장군이 101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장경석 장군은 6·25전쟁에서 낙동강 전선을 사수해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한 고(故) 백선엽 장군과 더불어 유이하게 100세 이상 산 예비역 장군이다. 이제는 최고령 예비역 장군으로 하늘의 별이 됐다.
장경석 장군은 1948년 10월 25일 서울 영등포 당산동 경기 염직 공장을 부대 부지로 선정하고, 서북청년회 1800여명(포병 6개 대대)을 한 번에 모집해 육군 야전포병단을 창설한 인물이다.
1950년 5월, 소령으로 강원도 8사단 제1포병대대장을 맡은 장경석 장군은 6·25전쟁 개전 초 강릉 북방의 연곡천 주저항선에서 무려 27시간 동안 북한 인민군을 상대로 방어선을 유지했다.
1포병대대가 27시간 동안 연곡천 방어선을 유지함으로써, 사단 병력에는 피해 없이 대관령에 집결할 수 있었다. 또 전투력을 보존해 경북 영천 지구 전투에서 전력(戰力)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강릉 지역 주민들에게도 충분한 피란 시간을 제공해줬다. 이 전공(戰功)을 기리기 위해 1991년 12월 11일, 당시 전적지였던 강릉시 사천면 덕실리에 강릉지구포병전공비가 건립됐다. 비문에는 '1포병대대의 빛나는 전공으로 말미암아 기동부대가 무사히 대관령으로 철수해 전열을 가다듬어 향후 작전은 물론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기여했다'고 적혀 있다.
◆6·25전쟁 발발 후 최초 국군 승리 영천전투서 활약
6·25전쟁사(史)에서 다부동 전투 못지않게 치열했고 희생자가 많았던 영천지구 전투에도 장경석 장군은 참여했다. 영천은 개전 초기 8사단 16연대와 7사단 8연대가 북한 인민군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밀려 내줬다가 되찾은 곳이다.
당시 8사단은 영천 동북쪽에 21연대와 19연대가, 영천 서북쪽에는 8사단 공병대대와 5연대 일부가, 남쪽에는 11연대가 각각 배치돼 대구 방면으로의 돌파 저지선을 형성했다. 16연대와 3연대 일부는 예비로 확보했다. 장경석 장군과 영천 동북쪽의 21연대가 인민군의 수차례 공격을 격퇴하며 전과를 거뒀고 19연대가 영천을 장악하고 있던 인민군을 격멸하면서 영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장경석 장군은 생전 아주경제와 인터뷰에서 "만약 당시 영천이 인민군 손아귀에 들어갔다면 낙동강 전선은 무너졌을 것이다. 낙동강 전선 붕괴는 한반도 공산화와 다름없다는 점에서 영천지구 전투 승리는 6·25전쟁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지금도 영천지구 전투를 패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영천지구 전투를 6·25전쟁의 하이라이트라고 평가했다.
2014년 4월 8일 9사단에서 송계리전투 전승 63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장경석 장군을 기려 대대 진입로를 ‘장경석로(路)’, 대대 애칭을 ‘장경석 대대’로 명명했다. 이듬해 10월에는 9사단 영내에 ‘장경석 장군실’이 문을 열었다.
◆6·25전쟁 잿더미에 100만 그루 나무 심어
6·25전쟁 후 한국이 성한 나무 한 그루 찾기 힘들 정도로 잿더미가 되자 장경석 장군은 민·관·군 협동 조직이던 삼천위성회 등과 함께 36사단 내 30만평에 이르는 사방공사와 100만 식수(植樹) 계획을 세워 이를 달성했다.
장경석 장군이 살아온 삶의 궤적은 특별했다. 젊어서는 군인의 길을 걸어 장군이 됐고, 중년에는 요가로 도를 닦아 교수가 되고, 노년에는 컴퓨터를 만나 세상을 폭넓게 개척했다.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원충연 반정부 음모 사건' 피의자로 몰려 강제 예편돼 날개가 꺾인 것이 오히려 다채로운 삶을 살게 되는 전화위복이 됐다.
기개 섞인 서릿발에 '독수리'로 불렸던 장경석 장군, 육군 9사단 30포병부대 주변에는 장경석 장군 별명을 딴 '독수리 마을'도 있다.
100세의 나이에도 "포병은 쉬지 않는다. 쉬면 부패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고 밝힌 장경석 장군.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장경석 장군의 빛나는 생애는 오늘의 젊은 국군장병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되신 고 장경석 장군의 영면(永眠)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