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투자 광풍은 한풀 꺾였지만 이를 둘러싼 대내외 환경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당장 다음달 시행되는 특정금융거래정보법(특금법) 이후 많은 중소 거래소가 폐업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또 트래블룰의 시행을 두고 은행과 가상화폐거래소 간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금융당국 조사 결과 일부 가상화폐거래소에서 위장계좌 14개가 발견되면서 고객(투자자) 위험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다.
◆트래블룰 시행 두고 은행-가상화폐거래소 평행선
앞서 농협은행이 가상화폐거래소 빗썸과 코인원에 트래블룰 체계를 구축하기 전까지는 코인의 입·출금을 중단하라고 요청했다. 이에 거래소 업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가상화폐 업계에 따르면 농협은행은 특정금융거래정보법(특금법) 개정안이 정한 트래블룰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시스템을 구축하기 전까지는 일단 코인의 이동을 막아달라는 취지였다고 밝혔다.
거래소 입장에서는 요구인 만큼 당장 따라야 할 의무는 없지만 실명계좌 발급 계약 연장이 필요한 만큼 무작정 피할 수 없는 처지다.
빗썸과 코인원 측은 향후 대응 방안에 대해 내부에서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까지 다른 은행들의 요청은 없었지만 빗썸과 코인원 외 거래소들도 관련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 거래소 업계 관계자는 “내년 3월로 예정된 시행 시기에 앞선 제안에 거래소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실명계좌 발급을 좌우하는 은행의 요청을 거부할 수도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양측이 입장 차이를 보이면서 금융당국은 트래블룰의 시행 시기를 내년 3월 25일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각 거래소가 이때까지만 트래블룰 적용을 위한 시스템을 갖추면 된다는 것이다.
금융당국 측은 “거래소들은 트래블룰 시스템을 내년 3월 25일까지만 구축하면 된다”며 “시행령 부칙으로 1년간 트래블룰 시행을 유예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트래블룰에 따라 특금법 개정안에서는 거래소 간 코인을 이전할 경우 송·수신자의 이름, 가상자산 주소를 제공하도록 규정했다. 트래블룰은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자금세탁 방지를 위해 가상자산 전송 시 송·수신자 정보를 모두 수집해야 하는 의무를 사업자(거래소)에 부과한 규제이기 때문이다.
◆내달 시행 특금법, 가상화폐거래소 줄폐업 가시화
개정된 특금법 적용이 약 두 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일부 중소 가상화폐거래소의 폐업이 가시화하고 있다. 가상화폐거래소들은 “현재 상황에서는 은행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실명계좌를 받기에는 역부족”이라며 “금융당국이 특금법에 따른 신고 기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도 은행권의 소극적인 태도를 인식하고 있다. 다만 “금융당국이 은행들의 결정을 강제할 수는 없다”며 신중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이라도 지금부터 거래소 폐업에 서둘러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달 15일 달빗거래소가 문을 닫으면서 투자자들이 피해를 봤던 문제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가상화폐거래소들에 따르면 이날 현재 전국에 있는 60여개 거래소 가운데 실명계좌를 갖고 있는 곳은 빗썸, 업비트, 코빗, 코인원 등 4곳에 불과하다.
때문에 개정된 특금법이 적용되는 오는 9월 25일 이후 국내 가상화폐거래소는 이 4곳만 남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은행에서 실명계좌를 받지 못하면 금융위에 신고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행이 가상화폐 거래에 대한 관심을 접은 것은 아니다. 은행연합회는 지난달 8일 가상화폐거래소 자금세탁 위험평가 방안을 공개했다.
다만 은행들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회·경제적 파장 때문이다. 부실한 검증으로 실명계좌를 발급해줄 경우 자금세탁 등 범죄에 악용되거나 환치기 등 시장질서를 어지럽히는 데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가방안에 익명성을 보장하는 다크코인 등의 여부를 필수로 들여다보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거래소들은 이미 평가기준에 따라 자체 검증과 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특히 시중은행들이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 중소형 거래소들의 반발은 더욱 큰 상황이다. 이들은 평가기준에 맞춰 준비를 제대로 해도 은행들이 실명계좌 발급에 여전히 소극적이라는 불만이 나온다.
결국 이들의 목소리는 정부를 향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 은행들의 적극적인 검증 참여를 이끌고, 그간 소극적인 검증 기간을 고려해 신고 기한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상화폐 관계자는 “지난번 달빗거래소가 서비스를 종료할 당시 소비자 피해 구제에 대한 대책은 완전 부재했다”면서 “거래소가 안전 대책을 세우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이에 대응할 시간을 주지 못한 금융당국도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가상화폐거래소 14개 위장계좌 확인
이런 가운데 금융당국 조사 결과 가상자산 사업자가 보유 중인 일부 계좌가 위장계좌로 확인돼 고객 피해에 대한 우려를 높이고 있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79개 가상자산 사업자가 보유 중인 집금계좌는 94개이며, 그중 14개는 위장계좌로 확인됐다.
집금계좌는 사업계좌와 겸용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으며, 집금·출금계좌를 은행을 달리해서 별도로 운영되는 곳도 있었다. 특히 전자결제사업자(PG)의 가상계좌, 펌뱅킹서비스를 이용해 집금 및 출금이 이뤄지는 업체도 있었다.
금융위는 특금법 신고마감일인 오는 9월 24일까지는 과도기적으로 집금계좌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용자 보호 측면에 전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집금계좌, 위장계좌 운영 실태를 파악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조사결과 금융회사들이 집금계좌 개설을 엄격히 하고 모니터링을 강화하자,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별도 신설 법인을 만들어 집금계좌를 개설하는 곳도 있었다.
소규모 가상자산 사업자의 경우 상호금융사 및 중소규모 금융회사에 집금계좌를 개설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고 금융당국은 전했다.
금융당국은 일부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위장계좌에 대한 거래중단 등의 조치로 금융회사를 옮겨 가며 위장계좌 개설과 폐쇄를 반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선 금융회사들은 발견된 위장계좌에 관해 확인 후 거래중단 등의 조치를 추진할 예정이다.
또 금융회사들이 모르는 상태에서 PG사의 가상계좌, 펌뱅킹서비스를 이용해서 가상자산의 집금·출금이 이루어지는 곳에 대해서는 PG사의 가상계좌서비스, 펌뱅킹서비스와 연계되어 집금·출금에 사용되지 않도록 주의 조치했다.
PG사에도 가상계좌서비스, 펌뱅킹서비스 제공 시 가상자산 사업자 여부를 확인하고 반드시 위험평가를 진행하도록 처리했다.
아울러 가상자산 사업자 집금계좌에 대해 예치금 횡령 등 자금세탁 행위, 탈법행위와 관련된 금융거래 등의 징후가 발견될 경우, 의심거래보고제도(STR) 정보와 함께 검·경에 일괄 제공할 예정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특금법 신고기한 만료일까지 한시적으로 영업하면서 사업을 폐업하는 등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어 가상자산 사업자 영업 동향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