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신아방강역고-31] 세종대왕은 조선의 광개토대왕(1)

2021-06-03 06:00
  • 글자크기 설정

제1차 파저강 정벌의 배경과 전개

세종실록엔 만주 정벌, 교과서엔 압록강 수비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588년전 오늘(6월3일)(1)* 조선시대 최대 경사가 발생했다
 
임금이 경회루에 나아가, 황희 등에게 파저강(婆猪江)(2)*의 승전을 종묘에 고할 것을 이르다
임금이 경회루 밑에 나아갔다. 의정부와 육조에서 풍정을 알리고, 왕세자 및 종친과 여섯 대언들이 연회에 입시하였다. 임금이 황희 등에게 이르기를,
"파저강의 도적이 모두 평정되고 우리의 군사가 완전하매, 내가 승전을 종묘에 고하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니, 황희가 아뢰기를,
"이는 실로 신 등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바입니다. 지금 상교를 들으니 참으로 이치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집현전에 명하여 옛 글을 상고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파저강 지방은 산천이 험하고 부락이 흩어져 있어, 정벌을 명할 당초에야 어찌 크게 이기기를 뜻하였으리오. 지금 첩서가 여러 번 이르니 퍽 기쁘다."
하니, 황희 등은, "그러하옵니다."
하고, 이조 판서 허조는 아뢰기를, "우리 조선의 억만년 무궁한 복조가 실로 이 거사에서 싹틀 것입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60권, 1433년 (세종 15년) 음 5월 7일 기미 1번째기사
 
◆'조선의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흔히들 '한민족의 애환' 이라고 하는데... 필자는 지난 3년간 애국가와 무궁화를 톺아보다가 자연스럽게 '삼국사기'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한국 대표 3대 정사를 3회독했다. 그런데 웬걸, 한민족의 애환은 전혀 없고 진취와 패기 긍지만 충만했다.
 
조선 초대 임금 태조 9대 임금 성종때까지 1392년~1494년까지 약 100년간의 벌어진 전쟁은 수비형 전쟁이 아니라, 대부분 한반도 밖 대마도 정벌과 압록강 두만강 이북 만주에서의 공격형 정벌이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조선의 광개토대왕이었다. 그 증거를 들어보겠다.
 
◆제1차 파저강 정벌의 배경

조선 초기 만주 지역의 여진족은 가장 북쪽인 후룬강과 헤이룽장강 일대에 사는 야인(野人)여진과 쑹화강 동쪽의 연해주 지방에 사는 해서(海西)여진, 쑹화강 서쪽과 랴오허에 사는 건주여진(建洲)으로 구분됐다. 명 성조 영락제는 자신의 장인이자 여진족 족장 아합출(阿哈出)을 건주여진의 지휘사로 삼고 그에게 이사성(李思诚)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의 손자 이만주(李滿住, ?~ 1467)는 1424년(세종 6년)에 야인여진의 후룬강 올적합(兀狄哈)이 압박해오자, 파저강(훈강) 유역의 다회평(多回坪 지금의 통화시 인근)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1388년 명태조 주원장은 명나라 군대를 동북지방으로 보내어 원나라가 건립한 한반도내 쌍성총관부를 설립한다고 했을 때 고려가 강력히 저항했다.
 
명에 철령위 설치의 중지를 요청하는 표문을 보내다
명(明)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세우고자 하니, 우왕이 밀직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으로 청하기를, “조종으로부터 전해내려온 데에 구역이 정해져 있으니, 철령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文州)·고주(高州)·화주(和州)·정주(定州)·함주(咸州)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중략)
지금 성지를 받들어 보니,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에서 개원(開元)에 속하였으나, 관할하는 군민들도 요동(遼東)에 속하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철령의 산은 왕경(王京)으로부터 거리가 겨우 300리이며, 공험진을 변방의 경계로 삼은 것은 1, 2년이 아닙니다. 다행히도 선왕이(공민왕)이 밝은 시대를 맞이하여 제후의 법도에 맞추어 직임을 수행하여 그 땅이 이미 저희 판도에 들어왔습니다.
『고려사』 1388년 (우왕 14년) 2월
 
 
1403년 명 영락제는 철령이북과 공험진(흑룡강 학북진)이남을 조선에 귀속한다(3)*고 선포했다.
 
이처럼 두만강 이북의 공험진 이남은 동북쪽의 야인여진과 해서여진은 조선에 복속했으나 압록강 이북의 서부쪽 여진족 즉 건주여진족은 조선의 통치를 거부했다.
건주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넘어 조선으로 침입해 약탈과 납치 등을 저질렀는데, 올량합 이만주 부족도 파저강 유역으로 남하한 뒤에 압록강 유역의 강계와 여연등에 빈번히 출몰했다.

1432년 12월에 여진족이 강계와 여연을 공격해 수십 명이 전사하는 피해가 발생하자, 세종대왕은 이듬해 1433년 3월 15일~26일 건주여진의 본거지인 파저강 유역의 정벌을 논의 결정했다.(4)*

임금이 장차 파저강(婆猪江) 야인을 토벌하려고 대신에게 시험하고자 하여, 비밀히 의정부·육조·삼군 도진무 등에게 저들을 대적할 방법과 죄를 성토(聲討)할 말과 토벌할 계책 등을 각각 진술하게 하니,
『세종실록 59권』, 1433년 (세종 15년) 2월 15일 (양력 3월 15일)
 
의정부·육조·도진무 등을 불러서 논의하기를, "지금 이미 파저강을 토벌할 계책을 정하였는데, (중략)
"최윤덕으로 주장(主將)을 삼고, 또 변장 두 사람을 보내어 좌·우익을 삼거나, 혹은 따로 세 원수(를 보내고, 최윤덕을 도통사(都統使)로 삼는 것이 어떨까."
『세종실록 59권』, 1433년 (세종 15년) 2월 26일 (양력 3월 26일)
 
◆제1차 파저강 정벌 전개
 
여진 정벌을 위해 평안도 병마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은 1433년 4월 29일에 평안도의 군사 1만과 황해도의 군사 5천을 강계부(江界府)에 집결시켜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 근거지를 공격했다.
 
1433년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은 임지로 부임하여 차근차근 정벌에 대한 준비를 실행하였다. 정벌 준비가 완료되고 4월에 모든 군사가 강계부에 집합했다.
 
4월 10일 압록강을 도강하여 북방 오늘날 통화(通化)역의 파저강으로 진격했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최윤덕은 직접 병사를 이끌고 조선 국경을 침범해 약탈을 저지른 임합라(林哈剌)의 성채로 향했으며, 중군절제사 이순몽은 이만주의 성채로 갔다. 그리고 좌군절제사 최해산은 거여, 우군절제사 이각은 마천(馬遷), 조전절제사 이징석(李澄石)은 올라(兀剌)로 향했다. 조선의 군대가 이처럼 부대를 나누어 여러 지역으로 동시에 나아간 것은 흩어져 살고 있는 여진족들이 서로 호응해 집결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한 방책이었다.
 
4월 19일 최윤덕은 어허강(魚虛江; 훈강의 지류, 지금의 야흐(雅河)조선족자치향) 일대로 진격해 임합라와 손타나노의 성채를 공격했다. 여진족 추장 임할라 휘하의 여러 부락들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고 무기와 가축 다수를 노획했다. 4월 20일 최해산 부대는 최윤덕 본대와 합류하여 공격해 야인 장정 31명을 사로잡았으나 곧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켜 26명을 사살하고 5명을 억류시켰다.
 
토벌 도중 야인들이 밭에 불을 질러 군사들이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했으나 곧 회복하고 파저강 일대의 야인들을 모두 평정하였다. 정벌 과정에서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소탕 과정에서 여진족 180여 명이 죽고 230여 명이 포로로 붙잡았다. 이만주는 올미부兀弥府 지금의 환런(桓因)시 유역으로 도주했다.
 
이 제1차 파저강 정벌의 전과는 소규모라 할 수 있지만 영향은 지대했다.
 
◆세종실록엔 만주 정벌, 교과서엔 압록강 수비
 
'세종실록'과 달리 국내 대다수 오프라인 텍스트엔 최윤덕 장군이 파저강이 아닌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한 것으로 왜곡되어 있다. 또한 세종대왕의 4군6진 개척으로 비로소 조선 국경이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른 것으로 조작돼 있다.
 
파저강 전투 이후에 조선은 강계와 여연 사이에 자성군을 새로 설치해 이 지역에 대한 방위를 더욱 강화했다. 최윤덕과 이천 등은 여연군, 자성군, 무창군, 우예군 등에 성을 쌓고 방어 진지를 만들었다. 또한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함경도) 도절제사로 삼아 동북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게 했다. 그런 다음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을 설치했다. 6진은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이며 4군과 함께 조선의 북쪽 국경을 이루게 되었다. 세종 시기에 이루어진 이러한 여진 정벌은 4군과 6진의 설치로 이어졌다. [두산백과] 파저강전투와 4군6진
 
1433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만 5천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나무 위키] 4군6진
 
사실은 세종의 4군6진은 새로이 개척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4군 6진을 북방영토 진출과 관리를 위한 전전기지화한 것이다.

여연군을 승격시켜 부(府)로 삼고 진(鎭)을 설치하였다. 여연군이 요해처(要害處)에 당하여 인물이 적기 때문에 장차 백성을 옮겨 이곳에 살게 하려고 함이었다.
「세종실록』 1435년 (세종 17년) 8월 2일
 
사실은 세종시대 조선 서북 국경은 압록강 이남이 아니라 압록강에서 50km 쯤 북상한 훈강 동남쪽이었다.
 
파저강(婆猪江; 훈강渾江)은 그 근원이 장백산(長白山)에서 흘러 나와 우리 나라의 터전이 되어, 강 동쪽은 우리 지경이 되고, 강 서쪽은 저들의 거주지가 되고 있사온데, 의주로부터 여연까지의 상거가 1백여 리로서 야인들이 우리 지경을 출입하며 도적질을 감행하는 자가 모두 이 강을 경유하고 있사온즉, 『세종실록』 1436년(세종 18년) 6월 19일

(계속)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 사전 4군6진 모두 압록강 두만강 이남으로 한반도내로 축소 왜곡해놓고 있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각주

(1)* '세종실록'엔 ‘음력 5월 7일 기미’로 기록돼 있으나 필자가 만세력을 참조 양력으로 전환했다.
(2)*파저강은 중국의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강 중 가장 긴 강(445㎞)이다. 조선전기와 명나라때는 파저강 (婆猪江),조선 후기와 청나라시대엔 동가강(佟佳江),중화민국시대에 이르러 강물이 혼탁하다하여 혼강(渾江)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훈강은 길림성 혼강시 북부 장백산맥에서 발원하여 통화현으로 스핑 환런 야허, 사천즈 덴즈 관덴현에서 압록강에 합류한다
(3)*铁岭以北、公崄镇以南划归朝鲜
(4)*다음은 「세종실록」의 1차 파저강정벌에 관한 기록이다. 세종대왕은 오래전부터 파저강 정벌을 위하여 간첩 파견, 정보수집부터 작전 지휘까지 모든 것을 총지휘하였다.
병조에서 파저강의 올량합의 거처를 정탐하여 아뢰다 1428-02-25 (세종 10년)
파저강에 거주하는 올량합이 도움을 청하니 우선 사람을 보내 정탐하도록 하다 1428-03-25 (세종 10년)
평안도 도절제사가 이만주가 보호하고 있는 포로를 가서 거느리고 올 것을 치보하다 1432-12-21 (세종 14년)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도진무 김효성·경력 최치운 등이 사조하다 1433-01-19 (세종 15년)
의정부·육조 등에게 파저강 야인에 대한 대처 방식과 토벌할 계책 등을 진술하게 하다.1433-02-15 (세종 15년)
임금이 야인이 국경에 이르러 조현하기를 청하면 어떻게 할지를 논의하다 1433-02-17 (세종 15년)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파저강 야인을 토벌할 때 보졸을 뽑아서 가야겠다고 이르다 1433-02-20 (세종 15년)
황희·권진·하경복 등을 불러 평안도에서 쓸 병장 잡물의 수량 등을 논의하다 1433-02-21 (세종 15년)
의정부·육조 등을 불러 파저강을 토벌할 계책을 논의하다 1433-02-26 (세종 15년)
의정부·육조 등을 불러 주장과 함께 권략있는 자를 골라 정할 것을 논의하다 1433-02-27 (세종 15년)
의정부·육조 등을 불러 야인들을 안심시켜 뜻하지 않을 때 공격할 것을 논의하다 1433-02-28 (세종 15년)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이 경력 최치운을 보내 파저강 토벌에 관해 아뢰다 1433-03-07 (세종 15년)
지신사 안숭선이 김청과 더불어 파저강을 토벌하는 성죄방목을 초하여 아뢰다 1433-03-10 (세종 15년)
평안도와 황해도 감사에게 병조로 하여금 그 도의 군사를 발하게 하였음을 전지하다 1433-03-15 (세종 15년)
대신들과 북정하는 군사의 양식준비와 명령 불복종에 대한 상벌 등에 관해 논의하다 1433-03-16 (세종 15년)
이조 정랑 김하에게 명하여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알목하 야인에 관해 전교하다 1433-03-18 (세종 15년)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를 아뢸 것을 말하다 1433-03-20 (세종 15년)
전 소윤 박호문이 파저강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야인의 소식을 자세히 묻다 1433-03-21 (세종 15년)
집현전 부제학 이선을 보내어 북정의 장졸에게 교서를 반포하다 1433-03-22 (세종 15년)
최윤덕에게 동맹아첩목아에 대한 처분에 관해 내전하다 1433-03-25 (세종 15년)
임금이 안숭선과 김종서에게 권두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협공할 것을 묻다 1433-04-05 (세종 15년)
황희·맹사성·권진 등을 불러 정사를 논의하다 1433-05-03 (세종 15년)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이 오명의를 보내어 야인 평정을 하례하는 전을 올리다 1433-05-05 (세종 15년)
임금이 경회루에 나아가, 황희 등에게 파저강의 승전을 종묘에 고할 것을 이르다 1433-05-07 (세종 15년)
평안도 절제사 최윤덕이 파저강의 토벌에 관해 치계하다 1433-05-07 (세종 15년)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