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험진을 아는가? 공험진 이남은 우리 영토, 너희는 공험진을 잊지 말라!
-세종대왕, 과거 합격자들에 대한 훈시
∙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영토다(公險鎭以南, 朝鮮之境) - 명태조 주원장의 조서
∙ 윤관이 공험진에 산성을 쌓고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고려사』 열전 9 윤관
∙흑룡강성 학강(鹤岗)시 도처에 옛 산성들이 발견되었으나 중국당국은 이례적으로 연혁을 밝히지 않고 있다.
공험진은 어디인가? 세종대왕을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 지리상 최고(最古, 最高), 최장, 최대 의문부호이자 대한영토 남북 사천리(4000리)의 북방 경계의 위치를 푸는 최종 열쇠다.
공험진에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고려사』에 11회, 『고려사절요』에 3회, 『조선왕조실록』 17회나 등장한다.
∙ 공험진은 1108년(예종 3년)에 성을 쌓아 진을 설치하고 방어사로 삼았다. 1111년(예종6년)에 산성을 쌓았다. -『고려사』 표 예종 권표 제1
∙ 공험진에 방어사·부사·판관을 두었다. 또 함주 및 공험진에 성을 쌓았다. -『고려사절요』 1108년(예종 3년) 2월
∙ 윤관이 북계에 여러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들을 옮겨서 이를 채웠다. 공험진·통태진·평융진3진에는 각각 5천 호를 두었다. 중성을 함주에 쌓고 산성을 공험진에 쌓았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
1996년 헤이룽장성 허강시(鹤岗市) 서부 교외 야저령(맷돼지령野猪岭)에 옛 산악도시가 발견됐다.
허강시 건설위원회 역사 기록실 편집자들에 따르면 야저령능선 남쪽의 양지바른 경사면에 발견된 고대 산악도시는 타원형으로 둘레는 450m의 산성이 둘러싸였다. 산성의 길이는 남북으로 210m, 폭은 동서로 80m다. 27개의 토굴이 발견되었으며 직경 6m의 토굴 2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있다고 발표했다.(1)* 그런데 중국당국은 이 옛 산악도시에 대하여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다.
2008년 7년 허강시 중심지 동쪽에 인접한 뤄베이(萝北)현 허베이(鶴北)진 북쪽산 부근에 옛성터를 발견했으나 이 역시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2)* 뤄베이현 중심지에는 이주 경로와 정착 시점을 알 수 없는 약 5000여명의 조선족이 집거지 동밍(东明) 조선족향(朝鲜族乡)이 있다.
허강시 남쪽에 인접한 송화강 변의 중대형도시 쟈무스(佳木斯)시는 약 2만5000여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 화촨현과 탕원현에도 역시 이주경로와 정착 시점을 알수 없는 조선족 집거지 두 곳이 있다. 쟈무스시의 남쪽 스펑산(四豐山)산성 유적과 서쪽 교외 난청즈(南城子)옛 산성도 자무스시가 자랑하는 명승고적이지만 이 두 산성의 상세한 연혁 역시 베일에 둘러 쌓여 있다.
허강시 2개소 쟈무스시 2개소 헤이룽장성 관내 4개소 산성의 이력서는 블라인드 처리돼 있다. 자국의 유구한 역사에 대해 세세한 설명을 하며 자랑하기 좋아하는 중국 관방학계의 평소 행태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매우 이례적이다.
공험진을 제일 많이 언급한 임금은 세종대왕이다. 조선왕조실록에 10회, 재위 32년간 총편집장 역할을 한 『고려사』 11회를 합하면 총 21회나 언급했다. 지면관계상 3회만 간략히 소개한다.
근정전에 나아가 회시에 입격한 유생 남수문 등에게 책문하다.
왜국(倭國)이 와서 복종하여 조정과 민간이 승평(昇平)하며, 백성이 편안하고 물질이 풍성한 지 대개 40년이 되었다. 나는 큰 공적을 계승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편안하지 못하고, 장구하게 다스려지고 오래도록 편안할 도리에 이르기를 기대했는데, 함길도 경원(慶源)의 일만은 의논할 만한 것이 있다. 공험진(公險鎭) 이남은 나라의 옛날 봉강(封疆)이니, 마땅히 군민을 두어서 강역을 지켜야 될 것이라. -『세종실록』 1426년(세종 8년) 4월 11일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를 아뢸 것을 말하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고려의 윤관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소탕하여 주진을 개척해 두었으므로, 여진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 나라의 위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관이 주를 설치할 적에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고황제(高皇帝; 명태조 주원장)가 조선 지도를 보고 조서하기를,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 ’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세종실록』 1433년 (세종 15년) 3월 20일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비 등 동복지방에 대해 아뢰라고 전지하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이 장백산 북록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르기를, ‘윤관이 공험진(公嶮鎭)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이 선춘점의 어느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히어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밖에 옛 성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에 비갈(碑碣)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을 쫓고 9성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城)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쪽에 있는가. 상거(相距)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하였다. -1439년 (세종 21년) 8월 6일
김종서(고려사 편집부책임자격)는 세종대왕의 의문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 편으로 답한다.
필자는 세종실록지리지등 한중양국 정사를 온고지신하고 현대의 구글 지도를 따라 하나하나 현재의 지명으로 비정해 보겠다.
일제 강점기 일본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등은 세종실록 지리지편을 9성 위치를 현재 함경북도 길주 이남의 함흥평야 일대라고 왜곡했다. 고려의 북쪽경계 공험진의 위치에 관한 선행연구를 검토해보다가 모든 전문가 석학 대가들께서 1리(고려 조선시대 576m)를 1905년 일제가 축소조작한 4킬로미터(393m)로 산정하고 있다.(3) 이를테면 두만강 북쪽 250리는 144km이나 98km로 축소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서술된 공험진은 지금 옌지시, 선춘령은 왕칭현이 유력하다"고 설명했다. - 이상태 한국영토학회 부회장(4)*
함길도의 남쪽은 철령으로부터, 북쪽은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1천 7백 여 리이다.-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세종시대 1리는 576미터로서 1700리는 약 980㎞이다. 철령에서 북쪽으로 1700리 980㎞를 떨어진 곳은 놀랍게도 중국 당국이 비밀에 붙이고 있는 옛 산성 밀집지 허강시 일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 편에는 마치 네비게이션처럼 공험진으로 가는 경로와 거리가 소상히 기재되어 있다. 허강시 일대가 정확한가 이를 다시 더 미시적으로 세밀히 파악 교차 확인해보기로 한다.
동림성(東林城)에서 북쪽으로 5리쯤 가면 소다로의 영기(營基)가 있고, 그 북쪽으로 30리에 회질가탄(會叱家灘)이 있으니, 바로 두만강의 하류이다. 강을 건너 10리 되는 넓은 들 가운데에 큰 성이 있으니, 곧 현성(縣城)이다. 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 그 북쪽으로 90리 되는 곳의 산상에 옛 석성(石城)이 있으니, 이름이 ‘어라손참(於羅孫站)’이다. 그 북쪽으로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이 있고, 그 북쪽으로 60리에 유선참(留善站)이 있으며, 그 동북쪽으로 70리에 토성기(土城基)가 있으니, 곧 거양성(巨陽城)이다.
안에 돌기둥 둘이 있으니, 예전에 종을 달던 곳이다. 종의 높이가 3척, 지름이 4척이 넘었었다. 일찍이 경원 사람인 유성(庾誠)이란 자가 그 성에 가서 그 종을 부수어서 말 9마리에 싣고 왔는데, 겨우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었고, 따라갔던 사람 30여 명이 모두 죽었다. 그 나머지 쇠붙이는 풀숲 가운데 버려져 있었으나, 누가 감히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그 성은 본래 고려 대장 윤관(尹瓘)이 쌓은 것이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현(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胡人)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선춘현에서 수빈강(愁濱江)을 건너면 옛 성터가 있고, 소다로에서 북쪽으로 30리를 가면 어두하현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60리에 동건리(童巾里)가 있고, 그 북쪽으로 90리를 가면 오동 사오리참(吾童沙吾里站)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60리에 하이두은(河伊豆隱)이 있고, 그 북쪽으로 1백 리에 영가 사오리참(英哥沙吾里站)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소하강(蘇下江) 가에 공험진(公險鎭)이 있으니, 곧 윤관이 설치한 진(鎭)이다.
필자는 위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의 공험진을 찾아가는 상세기록을 네비게이션 삼아 구글 지도상의 현대 지명과 거리를 하나하나 대조해 가며 북진해보았다.
두만강 하구 회질가탄(시웨이즈西葳子)사주(沙州)를 건너
→ 북10리 5.8㎞ 현성(훈춘 琿春)
→ 북90리 52㎞ 어라손참 (푸싱전 復興鎭 )
→ 북30리 17㎞ 허을손참 (뤄즈고우진 羅子溝鎭)
→ 북60리 35㎞ 유선참 (동광진東光鎭)
→ 동북 70리 40㎞ 거양성 (동닝東寧시)
→ 서60리 35㎞ 선춘령 (라오예老爺령 철령(鐵嶺)진 부근)
→ 서쪽으로 수빈강(무단장牧丹江(5)* ; 수빈하绥滨河 )을 건너면
→ 옛 성터(하이린시海林市인근; 허난조선족향 )
→ 북30리 17㎞ 어두하현 (츠하紫河진)
→ 북60리 35㎞ 동건리 (구청古城진)
→ 북 90리 52㎞ 오동사오리참(샤오우참(小五站)
→ 북60 35㎞하이두은(차오양朝陽촌 살구나무杏樹조선족향)
→ 북100리 58㎞ 영가사오리참(스마자四馬架참)
→ 소하강(송흐장松花江)가에 공험진(허강鶴崗시, 허베이진鶴北鎭)
상술한 바와 같이 역사학과 지리학 고고학을 각각 가로 세로 높이로 삼은 입체적 동태적 분석결과 공험진은 흑룡강성 학강시 학북진으로 비정한다.
첨언하건데 아래 중국 정사 『금사(金史)』의 관련 기록으로 필자의 비정을 교차 재확인하고자 한다.
요나라 황제가 말하길, 고려의 북쪽 경계는 용천에 달했고 서쪽 경계는 압록에 달했다(北抵龍泉, 西極鴨緣) 고려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살해하고 갈라전(曷懶甸)으로 출병시켜 9성을 쌓았다. -『금사』 135권 열전 73, 외국하 고려전
용천은 단 한군데 송화강 발해 상경 용천부로 학강시 일대와 인접하고 있다.
갈라전은 윤관이 9성을 설치할 때 금의 아골타와 쟁탈전을 벌였던 지역이다. 갈라전은 만주의 동부지역 일대의 송화강(별명; 혼동강, 소하강)유역과 목단강(牧丹江, 상류; 수빈하) 학강시를 포괄한 연해주까지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가리킨다.
◆◇◆◇◆◇◆◇각주
(1)*尤凡若, 鹤岗市西郊野猪岭发现古山城 《北方文物》1997년 제2기
(2)*韩世明 邓树平 黑龙江省萝北县共青农场七连北山古山城遗址调查简报 , 《边疆考古研究》2011年 第1期 | 吉林大学文学院历史系 黑龙江流域博物馆
(3)**중국 역대 1리 거리 변화
*주周대 1里 = 300보= 300 × 8척 = 300 × 8 × 19.496cm = 497.9m
*당唐대 1里 = 360보= 360 × 5척 = 360 × 5 × 29.591cm = 532.6m
*명明대 1里 = 360보= 360 × 5척 = 360 × 5 × 32cm = 576m
*청淸대 1里 = 360보= 360 × 5척 = 360 × 5 × 32cm = 576m
*1929년 이후 현재 중국 1리 = 500m (『续文献通考』 「乐·度量衡」 조선시대 중기까지 1리는 명청시대 1리와 같은 576m, ※참조 [강효백의 新 아방강역고-3]일제가 10리를 4㎞로 축소 조작한 까닭
(4)*이상태 한국영토학회 부회장 "만주 동북지역은 우리 영토였다" 서울경제 2015년 9월 14일 37면
(5)*흑룡강성 목단강시는 세종시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 관할(세종실록지리지), 송화강의 최대지류 목단강(상류; 이도백하, 옛 명칭 수빈강)의 원류는 백두산 목단봉 牡丹江发源于长白山脉白头山之北的牡丹岭
-세종대왕, 과거 합격자들에 대한 훈시
∙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영토다(公險鎭以南, 朝鮮之境) - 명태조 주원장의 조서
∙흑룡강성 학강(鹤岗)시 도처에 옛 산성들이 발견되었으나 중국당국은 이례적으로 연혁을 밝히지 않고 있다.
◆천년의 의문 공험진은 어디인가?
공험진은 어디인가? 세종대왕을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 지리상 최고(最古, 最高), 최장, 최대 의문부호이자 대한영토 남북 사천리(4000리)의 북방 경계의 위치를 푸는 최종 열쇠다.
공험진에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고려사』에 11회, 『고려사절요』에 3회, 『조선왕조실록』 17회나 등장한다.
∙ 공험진은 1108년(예종 3년)에 성을 쌓아 진을 설치하고 방어사로 삼았다. 1111년(예종6년)에 산성을 쌓았다. -『고려사』 표 예종 권표 제1
∙ 공험진에 방어사·부사·판관을 두었다. 또 함주 및 공험진에 성을 쌓았다. -『고려사절요』 1108년(예종 3년) 2월
∙ 윤관이 북계에 여러 성을 쌓고 남계의 백성들을 옮겨서 이를 채웠다. 공험진·통태진·평융진3진에는 각각 5천 호를 두었다. 중성을 함주에 쌓고 산성을 공험진에 쌓았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
◆헤이룽장성에는 연혁을 밝히지 않는 4개소의 산성이 있다
허강시 건설위원회 역사 기록실 편집자들에 따르면 야저령능선 남쪽의 양지바른 경사면에 발견된 고대 산악도시는 타원형으로 둘레는 450m의 산성이 둘러싸였다. 산성의 길이는 남북으로 210m, 폭은 동서로 80m다. 27개의 토굴이 발견되었으며 직경 6m의 토굴 2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사람이 거주한 흔적이 있다고 발표했다.(1)* 그런데 중국당국은 이 옛 산악도시에 대하여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고 있다.
2008년 7년 허강시 중심지 동쪽에 인접한 뤄베이(萝北)현 허베이(鶴北)진 북쪽산 부근에 옛성터를 발견했으나 이 역시 자세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2)* 뤄베이현 중심지에는 이주 경로와 정착 시점을 알 수 없는 약 5000여명의 조선족이 집거지 동밍(东明) 조선족향(朝鲜族乡)이 있다.
허강시 남쪽에 인접한 송화강 변의 중대형도시 쟈무스(佳木斯)시는 약 2만5000여명의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다. 화촨현과 탕원현에도 역시 이주경로와 정착 시점을 알수 없는 조선족 집거지 두 곳이 있다. 쟈무스시의 남쪽 스펑산(四豐山)산성 유적과 서쪽 교외 난청즈(南城子)옛 산성도 자무스시가 자랑하는 명승고적이지만 이 두 산성의 상세한 연혁 역시 베일에 둘러 쌓여 있다.
허강시 2개소 쟈무스시 2개소 헤이룽장성 관내 4개소 산성의 이력서는 블라인드 처리돼 있다. 자국의 유구한 역사에 대해 세세한 설명을 하며 자랑하기 좋아하는 중국 관방학계의 평소 행태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매우 이례적이다.
◆공험진을 제일 많이 언급한 임금은 세종대왕
공험진을 제일 많이 언급한 임금은 세종대왕이다. 조선왕조실록에 10회, 재위 32년간 총편집장 역할을 한 『고려사』 11회를 합하면 총 21회나 언급했다. 지면관계상 3회만 간략히 소개한다.
근정전에 나아가 회시에 입격한 유생 남수문 등에게 책문하다.
왜국(倭國)이 와서 복종하여 조정과 민간이 승평(昇平)하며, 백성이 편안하고 물질이 풍성한 지 대개 40년이 되었다. 나는 큰 공적을 계승하여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편안하지 못하고, 장구하게 다스려지고 오래도록 편안할 도리에 이르기를 기대했는데, 함길도 경원(慶源)의 일만은 의논할 만한 것이 있다. 공험진(公險鎭) 이남은 나라의 옛날 봉강(封疆)이니, 마땅히 군민을 두어서 강역을 지켜야 될 것이라. -『세종실록』 1426년(세종 8년) 4월 11일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를 아뢸 것을 말하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고려의 윤관은 17만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소탕하여 주진을 개척해 두었으므로, 여진이 지금까지 모두 우리 나라의 위엄을 칭찬하니, 그 공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다. 관이 주를 설치할 적에 길주(吉州)가 있었는데, 지금 길주가 예전 길주와 같은가. 고황제(高皇帝; 명태조 주원장)가 조선 지도를 보고 조서하기를, ‘공험진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 ’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세종실록』 1433년 (세종 15년) 3월 20일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비 등 동복지방에 대해 아뢰라고 전지하다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이 장백산 북록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르기를, ‘윤관이 공험진(公嶮鎭)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이 선춘점의 어느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히어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밖에 옛 성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에 비갈(碑碣)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을 쫓고 9성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城)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쪽에 있는가. 상거(相距)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하였다. -1439년 (세종 21년) 8월 6일
◆공험진 선행연구자 모두 10리를 4㎞로 잘못 계산
김종서(고려사 편집부책임자격)는 세종대왕의 의문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 편으로 답한다.
필자는 세종실록지리지등 한중양국 정사를 온고지신하고 현대의 구글 지도를 따라 하나하나 현재의 지명으로 비정해 보겠다.
일제 강점기 일본학자 이케우치 히로시 등은 세종실록 지리지편을 9성 위치를 현재 함경북도 길주 이남의 함흥평야 일대라고 왜곡했다. 고려의 북쪽경계 공험진의 위치에 관한 선행연구를 검토해보다가 모든 전문가 석학 대가들께서 1리(고려 조선시대 576m)를 1905년 일제가 축소조작한 4킬로미터(393m)로 산정하고 있다.(3) 이를테면 두만강 북쪽 250리는 144km이나 98km로 축소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서술된 공험진은 지금 옌지시, 선춘령은 왕칭현이 유력하다"고 설명했다. - 이상태 한국영토학회 부회장(4)*
◆세종실록지리지를 네비게이션 삼아 공험진을 찾아
함길도의 남쪽은 철령으로부터, 북쪽은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1천 7백 여 리이다.-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세종시대 1리는 576미터로서 1700리는 약 980㎞이다. 철령에서 북쪽으로 1700리 980㎞를 떨어진 곳은 놀랍게도 중국 당국이 비밀에 붙이고 있는 옛 산성 밀집지 허강시 일대와 정확히 일치한다.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 편에는 마치 네비게이션처럼 공험진으로 가는 경로와 거리가 소상히 기재되어 있다. 허강시 일대가 정확한가 이를 다시 더 미시적으로 세밀히 파악 교차 확인해보기로 한다.
동림성(東林城)에서 북쪽으로 5리쯤 가면 소다로의 영기(營基)가 있고, 그 북쪽으로 30리에 회질가탄(會叱家灘)이 있으니, 바로 두만강의 하류이다. 강을 건너 10리 되는 넓은 들 가운데에 큰 성이 있으니, 곧 현성(縣城)이다. 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 그 북쪽으로 90리 되는 곳의 산상에 옛 석성(石城)이 있으니, 이름이 ‘어라손참(於羅孫站)’이다. 그 북쪽으로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이 있고, 그 북쪽으로 60리에 유선참(留善站)이 있으며, 그 동북쪽으로 70리에 토성기(土城基)가 있으니, 곧 거양성(巨陽城)이다.
안에 돌기둥 둘이 있으니, 예전에 종을 달던 곳이다. 종의 높이가 3척, 지름이 4척이 넘었었다. 일찍이 경원 사람인 유성(庾誠)이란 자가 그 성에 가서 그 종을 부수어서 말 9마리에 싣고 왔는데, 겨우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었고, 따라갔던 사람 30여 명이 모두 죽었다. 그 나머지 쇠붙이는 풀숲 가운데 버려져 있었으나, 누가 감히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그 성은 본래 고려 대장 윤관(尹瓘)이 쌓은 것이다. 거양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선춘현(先春峴)이니, 곧 윤관이 비를 세운 곳이다. 그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胡人)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는데,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선춘현에서 수빈강(愁濱江)을 건너면 옛 성터가 있고, 소다로에서 북쪽으로 30리를 가면 어두하현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60리에 동건리(童巾里)가 있고, 그 북쪽으로 90리를 가면 오동 사오리참(吾童沙吾里站)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60리에 하이두은(河伊豆隱)이 있고, 그 북쪽으로 1백 리에 영가 사오리참(英哥沙吾里站)이 있으며, 그 북쪽으로 소하강(蘇下江) 가에 공험진(公險鎭)이 있으니, 곧 윤관이 설치한 진(鎭)이다.
◆공험진은 흑룡강성 학강시 학북진
필자는 위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의 공험진을 찾아가는 상세기록을 네비게이션 삼아 구글 지도상의 현대 지명과 거리를 하나하나 대조해 가며 북진해보았다.
두만강 하구 회질가탄(시웨이즈西葳子)사주(沙州)를 건너
→ 북10리 5.8㎞ 현성(훈춘 琿春)
→ 북90리 52㎞ 어라손참 (푸싱전 復興鎭 )
→ 북30리 17㎞ 허을손참 (뤄즈고우진 羅子溝鎭)
→ 북60리 35㎞ 유선참 (동광진東光鎭)
→ 동북 70리 40㎞ 거양성 (동닝東寧시)
→ 서60리 35㎞ 선춘령 (라오예老爺령 철령(鐵嶺)진 부근)
→ 서쪽으로 수빈강(무단장牧丹江(5)* ; 수빈하绥滨河 )을 건너면
→ 옛 성터(하이린시海林市인근; 허난조선족향 )
→ 북30리 17㎞ 어두하현 (츠하紫河진)
→ 북60리 35㎞ 동건리 (구청古城진)
→ 북 90리 52㎞ 오동사오리참(샤오우참(小五站)
→ 북60 35㎞하이두은(차오양朝陽촌 살구나무杏樹조선족향)
→ 북100리 58㎞ 영가사오리참(스마자四馬架참)
→ 소하강(송흐장松花江)가에 공험진(허강鶴崗시, 허베이진鶴北鎭)
상술한 바와 같이 역사학과 지리학 고고학을 각각 가로 세로 높이로 삼은 입체적 동태적 분석결과 공험진은 흑룡강성 학강시 학북진으로 비정한다.
첨언하건데 아래 중국 정사 『금사(金史)』의 관련 기록으로 필자의 비정을 교차 재확인하고자 한다.
요나라 황제가 말하길, 고려의 북쪽 경계는 용천에 달했고 서쪽 경계는 압록에 달했다(北抵龍泉, 西極鴨緣) 고려는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살해하고 갈라전(曷懶甸)으로 출병시켜 9성을 쌓았다. -『금사』 135권 열전 73, 외국하 고려전
용천은 단 한군데 송화강 발해 상경 용천부로 학강시 일대와 인접하고 있다.
갈라전은 윤관이 9성을 설치할 때 금의 아골타와 쟁탈전을 벌였던 지역이다. 갈라전은 만주의 동부지역 일대의 송화강(별명; 혼동강, 소하강)유역과 목단강(牧丹江, 상류; 수빈하) 학강시를 포괄한 연해주까지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가리킨다.
◆◇◆◇◆◇◆◇각주
(1)*尤凡若, 鹤岗市西郊野猪岭发现古山城 《北方文物》1997년 제2기
(2)*韩世明 邓树平 黑龙江省萝北县共青农场七连北山古山城遗址调查简报 , 《边疆考古研究》2011年 第1期 | 吉林大学文学院历史系 黑龙江流域博物馆
(3)**중국 역대 1리 거리 변화
*주周대 1里 = 300보= 300 × 8척 = 300 × 8 × 19.496cm = 497.9m
*당唐대 1里 = 360보= 360 × 5척 = 360 × 5 × 29.591cm = 532.6m
*명明대 1里 = 360보= 360 × 5척 = 360 × 5 × 32cm = 576m
*청淸대 1里 = 360보= 360 × 5척 = 360 × 5 × 32cm = 576m
*1929년 이후 현재 중국 1리 = 500m (『续文献通考』 「乐·度量衡」 조선시대 중기까지 1리는 명청시대 1리와 같은 576m, ※참조 [강효백의 新 아방강역고-3]일제가 10리를 4㎞로 축소 조작한 까닭
(4)*이상태 한국영토학회 부회장 "만주 동북지역은 우리 영토였다" 서울경제 2015년 9월 14일 37면
(5)*흑룡강성 목단강시는 세종시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 관할(세종실록지리지), 송화강의 최대지류 목단강(상류; 이도백하, 옛 명칭 수빈강)의 원류는 백두산 목단봉 牡丹江发源于长白山脉白头山之北的牡丹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