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보험업계가 기업성 보험인 일반보험을 빠르게 늘리면서 오히려 역풍을 맞고 있다. 자동차보험과 실손의료보험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계약 규모가 크고 고액 보험료를 받을 수 있는 일반보험을 늘렸지만, 최근 대형 공장과 아파트의 화재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보험금 지출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금융당국이 일반보험의 리스크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보험사 자체 가격산출 능력을 갖추라고 주문했음에도 이를 준수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29일 손보업계에 따르면 삼성화재·현대해상·DB손해보험·KB손해보험·메리츠화재 등 4대 손보사의 지난해 말 기준 일반보험 손해율은 전년 대비 5~10% 포인트 급등했다.
KB손보의 일반보험 손해율은 전년 동기(75.7%)보다 11.2% 포인트 급상승한 86.9%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삼성화재의 일반보험 손해율은 7.4% 포인트 상승한 81.6%였다. 현대해상과 DB손보 역시 각각 전년 대비 4.7% 포인트, 0.9% 포인트 상승한 71.0%, 70.7%를 기록했다. 손보사들이 통상적으로 일반보험의 적정 손해율을 60~70% 수준으로 관리해온 것을 감안하면, 작년 손해율은 10%가량 높은 수준이다
일반보험이란 자동차보험과 장기보험(보험기간이 2년 이상인 상품)을 제외한 손해보험상품으로, 화재보험·해상보험·배상책임보험 등 재산보험과 주로 기업성보험을 말한다.
일반보험 손해율이 급등한 데는 최근 대형공장 등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등 대형 사건사고가 잇따라 발생한 영향이 컸다.
지난해 3월 롯데케미칼 대산공장 화재로 삼성화재와 현대해상, KB손보가 각각 100억원가량의 보험금을 지급했다. 이어 11월 LG화학 여수 공장 화재에서는 KB손보가 140억원의 보험금을 냈다. KB손보는 이어 GS건설 아파트 공사 중 화재로 40억원의 보험금도 부담했다. DB손보 역시 용인시 양지에서 발생한 화재와 울산 소재 기업의 태풍으로 인한 손해를 보상했다.
올해도 대형 공장의 화재와 건설현장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지난 23일 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해태제과 공장 쵸코동(2만8837㎡)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유통업계와 소방당국이 추산한 해당 화재의 손실액은 4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보업계에서는 이번 화재로 보험 계약자인 KB손보와 DB손보가 재보험 분량을 제외하고도 최대 100억원 이상 보험금을 지급할 것으로 전해졌다. 화재가 발생한 공장의 기업보험 지분은 KB손보가 85%, DB손보가 15% 정도 부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손보업계, 금융당국 규제완화 악용··· 일반보험 규모 키워
손보업계는 최근 자동차보험과 실손보험의 손실이 커지자 손실률이 낮은 일반보험을 확대해 왔다. 일반보험 중 기업성 패키지 보험은 보험료가 적게는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조원에 달하는 만큼, 손보사 입장에서는 특히 매력적인 상품으로 꼽힌다.
금융감독원과 손해보험협회 자료에 따르면 손보사업계의 작년 일반보험 수입보험료는 10조6692억원을 기록했다. 손보사의 일반보험 수입보험료가 10조원을 넘어선 것은 작년이 처음으로, 2017년(8조9117억원) 이후 4년 동안 20%가량 증가했다. 전체 보험료에서 일반보험이 차지하는 비중 역시 10.4%로 2017년(9.6%)보다 확대됐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손보사들이 금융당국의 일반보험 가격 자율화를 악용해 보험료를 확대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당국은 2016년 4월 기업성 보험료율 산출 시 기존의 '협의 요율' 외에 보험사가 자체적으로 판단한 '판단 요율'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재보험사가 정한 수치를 보험사가 그대로 받아쓰는 협의 요율 대신 보험사가 자체적으로 판단한 판단 요율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한 것이다.
이 경우 손보사들은 재보험 물량을 줄여 원수보험료를 높일 수 있다. 또 경쟁사보다 낮은 요율을 적용해 낮은 가격에 보험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당국의 규제 완화로 삼성화재는 가입금액 기준 1조원 이하 일반보험에 대해 판단 요율을 적용했다. 현대해상과 KB손보 역시 5000억원 이하 물건에 대해 협의 요율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이 같은 기업성 일반보험은 단일 보험사가 보험위험을 모두 지기에는 부담이 크기 때문에 재보험사로부터 요율을 받아오고 일부를 출재(出再)하는 것이 그동안의 관행이었다. 자체적인 요율로 보험을 받았다가 재보험 출재를 하지 못할 경우 보험사가 위험을 모두 져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처럼 대형 화재가 발생할 경우 과거 재보험 비중이 작아 보험사가 부담해야 하는 보험금이 커지는 것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기업보험을 포함한 일반보험의 경우 최근 몇 년간 글로벌시장에서 하드마켓(보험사들이 보험료를 인상하고 담보범위를 축소)으로 요율이 지속적으로 오르는 반면, 국내는 대형 손보사들이 판단 요율을 사용해 가격 경쟁을 하다 보니 보험료가 낮아져 글로벌 트렌드를 반영하지 않고 반대로 가고 있는 상황"이라며 "결국 사고가 발생하면 관련 보험사의 보험금 부담은 과거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금융당국이 손보사의 판단 요율을 허용하면서 보험사 자체적인 가격산출과 위험관리 능력 확대를 주문했다"며 "손보사들은 자체 위험관리 능력 확대보다는 당장의 매출(원수보험료) 늘리기에만 집중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