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러일전쟁 자금마련때 러 싫어하는 유대인이 도왔다

2021-03-21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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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과 월스트리트의 친일 금융인

[노다니엘]

[노다니엘의 일본 풍경화]  (25)


러일전쟁과 월스트리트
전회에 소개한 1936년 2월 26일에 있었던 청년장교들의 쿠데타사건에서 죽은 사람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민간인은 당시 대장대신(재무장관)이었던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였다. 막말 하급무사의 후예였던 그가 해외유학을 거쳐 일본역사상 최고의 재무관료가 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그가 러일전쟁의 비용을 대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다카하시는 1854년에 센다이의 무사 집안에 태어나 부잣집에 양자로 들어간다. 그의 양부모는 그를 당시 일본의 개항지였던 요코하마에서 미국인 선교사 헵번(James Hepburn)이 만든 사립학교에 보낸다. 다카하시가 열살 때의 일이었다. 12살에는 영국인가정의 급사로 일하다가 13살에는 미국 서부의 오클랜드로 건너가 노예반대운동을 하는 특이한 성장기를 보낸다. 이러한 경력을 통하여 그는 당시로는 드물게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게 된다. 귀국하여 영어교사 겸 관청의 통역으로 일하던 그가 정식공무원이 되는 것은 28살이 되던 1881년이다. 그는 이때부터 재무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30대 후반에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41세 나이에는 당시 일본의 외환은행이던 요코하마정금은행의 본점 지배인으로 옮겨, 1899년에 다시 일본은행 부총재로 취임한다.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부국강병정책을 추진하던 일본이 서양국가인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는 1904년에 다카하시는 전쟁비용을 마련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 그가 맡은 가장 어려운 임무는 서양의 금융시장에서 일본의 국채(戦時公債)를 발행하여 돈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러일전쟁

러시아가 압록강 하구 의주에 있는 용암포를 기습적으로 불법점령한 1903년 4월부터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1904년 2월 6일에 국교단절 전보를 러시아 측에 발신한 일본은 2월 8일에는 인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군함 2척과 여순항의 군함 2척을 불시에 격침시키고 군대를 남양만과 백석포에 상륙시킴으로써 러일전쟁을 개시하였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떠받들어지는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의 역사소설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은 일본이라는 아시아의 전근대국가가 러일전쟁에서 서양에 승리함으로써 아시아를 대표하는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그린다. 아시아국가 일본이 당시 막강하던 러시아에 어떻게 승리했는가를 설명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유력한 요인의 하나는 전쟁자금 동원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이 ‘서양을 꺾은 유일한 아시아국가’라는 자부심을 에둘러 표현할 때 쓰는 말이 ‘언덕 위의 구름’이다.

1904년 2월에 시작하여 1905년 9월에 끝난 러일전쟁에 필요한 자금으로 당시 일본정부가 추산한 금액은 4억5천만엔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정부의 연간세입 약 3억엔의 1.5배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일본정부는 이 전쟁자금의 조달을 당시 일본은행 부총재를 맡고 있던 다카하시에게 일임하게 된다.

1904년 2월, 다카하시는 당시 국제금융 중심지였던 런던에서 일본국채를 발행하여 천만 파운드를 조달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당시 일본정부가 제시한 조건은 연이율 5%, 10년거치, 45년간 상환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이미 런던에서 발행한 국채가 인기가 없었고, 전시국채를 발행한 일본이 러시아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둘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1904년에 런던에서 발행된 외국채의 이율을 보면 일본이 6%, 중국과 쿠바가 5%, 멕시코, 그리스, 에콰도르가 4%로 가장 높았다. 투자자 측에서는 일본국채의 리스크를 높이 본 것이다.

유태인이 뻗친 구원의 손길

국채발행에 난항을 겪고 있던 다카하시에게 뜻하지 않은 낭보가 들렸다. 당시 런던에 머물고 있던 미국의 은행가 제이콥 시프라는 사람이 500만 파운드 분량을 인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에 영국과 독일의 투자은행들이 적극성을 띠어 5월 11일에는 런던에서 500만 파운드, 12일에는 뉴욕에서 500만 파운드의 모집이 실행되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일본정부는 그해 7월까지 영국, 미국, 독일 시장에서 천만 파운드씩, 합계 3천만 파운드의 공채를 발행하게 된다.
 

[제이컵 헨리 쉬프] 


그렇다면 무리한 전쟁을 구상하던 일본정부에 구원의 손길을 뻗친 시프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제이컵 헨리 시프(Jacob Henry Schiff, 1847~1920)는 독일태생의 유대계 미국인 은행가이자 자선사업가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을 때 야코프 하인리히 쉬프(Jacob Heinrich Schiff)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남북전쟁이 끝난 후 18세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투자은행 쿤로브(Kuhn, Loeb & Co.)에 들어갔다. 38세이던 1885년에 사장이 된 그가 경영한 Kuhn, Loeb & Co는 20년 후에는 미국을 대표하는 투자은행 J.P. 모건으로 발전한다.
 

[트럼프타워가 된 쿤로브의 맨해튼 빌딩]





월스트리트에서의 탄탄한 기반을 바탕으로 그는 뉴욕에서 성공한 금융가이자 유대계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러시아 차르 치하의 유대인 박해와 미국의 반유대주의에 대항하였다. 특히 그는 러시아의 포그롬(유대인 차별)으로 고통받는 유대인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시오니즘 운동의 일환으로 컬럼비아나 하버드 등의 대학에도 많은 기부를 했다.

그러한 시프를 다카하시가 만난 것은 일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시프는 다카하시에게 일본융자를 도운 이유는 러시아의 반유대주의와 포그롬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말했다. 다카하시가 시프를 처음 만난 것은 1904년 4월이었다. 그때는 이미 러일전쟁이 발발한 지 2개월이 지난 때였다. 다카하시가 영국인 지인의 저녁에 초대되어 갔을 때 미국의 투자은행가라고만 소개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미국인이 일본공채 인수에 관심이 있다는 연락을 받게 된다.

다카하시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시프가 이미 일본군과 러시아군이 압록강에서 대치하게 될 것이며,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5월 1일의 압록강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를 거두고 10일 후인, 11일에 시프의 주도로 천만 파운드의 기채가 이루어진다. 당시 시프의 회사가 인수한 일본의 공채규모는 지금의 환율로 약 50억 달러에 해당한다.

당시 국제금융시장의 중심이었던 런던에서 일본에 대한 의구심은 일본에게 커다란 장애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시장의 불신을 깨준 사람이 시프였다. 다카하시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시프를 ‘일본의 진정한 친구’ (a true friend of my country)라고 기술하였다.

러일전쟁의 다음 해인 1906년 3월 28일에 도쿄를 방문한 그는 일본의 최고훈장인 욱일승천장 (Order of the Rising Sun)을 받는다. 이 시기에 확실히 드러나는 것은 그의 친일주의가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에 대한 반발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도움으로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를 제압하고 전쟁을 유리하게 끝냈으며, 두 나라의 승인을 받아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 후 도쿄를 방문한 시프가 자신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일본의 정책은 분명하게 아시아에서 식민통치를 통하여, 특히 코리아와 만주에서 새로운 시장을 구축하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중국과 그 나라의 거대한 자원들이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도록 모든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Japanese Policy is very evidently directing all its attention to the creation of new markets by colonization, especially in Korea and Manchuria. There is no doubt that everything is being done to bring China and her great resources under Japanese influence.)

그리고 도쿄를 떠나 가는 날 기자회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일본이 조선과 만주에서 시행하는 개방정책을 존중하며, 일본이 모든 방향에서의 정책을 실질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인 면에서 충실히 이행”한다고 믿는다(convinced that as far as Japan is concerned, the principle of the Open Door in Korea and Manchuria, will be scrupulously honored, and that Japan will keep faith in every direction and meet every engagement, actual or moral)는 것이다.

아시아가 근대화하기 이전에 우위에 있던 서양, 특히 유태계 금융인의 관심과 지지를 일본이 향유했던 사례는 시프에 그치지 않는다. 독일 쾰른에 근거를 두었던 금융재벌 어니스크 카셀(Earnest Cassel)이나 함부르크의 금융재벌 맥스 와버그(Max Warburg) 등은 모두 시프와 유사하게 일본에 우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카셀은 1902년에 처칠의 부탁을 받고 만 파운드의 일본국채를 구입하기도 하였다.

1910년의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미국의 은행가들은 일본의 야심을 목격하였고, 그것에 냉정한 계산으로 대처한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이념 등이 부딪치는 국가간의 갈등과 전쟁에 대하여 시프가 보여준 냉정한 타산은 그에게만 국한된다고 볼 수 없다. 시프가 대표하는 미국금융계의 유태인세력은 그의 후예, 골드만(Marcus Goldman), 삭스(Samuel Sachs), 리먼 형제 등에 대표되는 세력으로 지금도 국제금융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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