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본관 현관에 ‘정치 중립’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더라고 최근 국정원을 방문했던 정보위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여당과 야당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의 불법 사찰과 관련해 날 선 공방을 주고받으며 국정원을 끌어들이려 하는 시점에서 이런 입간판이 등장한 것이다. 국정원이 여야를 향해 정치중립 입장을 천명하면서 내부 단속을 하는 의미도 있다는 것이 정보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원은 원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도청, 댓글 조작, 특활비 유용 등으로 수난을 겪었다. 정부 기관 중에서 감옥에 간 수장의 수가 가장 많은 곳이 국정원이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정보위에서 “노무현 정부에서 감옥에 가본 내가 문재인 정부 임기말에 정치사찰을 하다 감옥에 또 가고 싶지 않다. 특수활동비도 차기 정부에서 까면 내가 또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한 푼도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의 사찰은 당장 부산시장 선거에서부터 뜨거운 감자가 됐다. 대법원은 작년 11월 시민단체 등의 청구를 받아들여 국정원의 사찰 정보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국정원은 대법원 판결에 따라 63건의 사찰문건을 공개했다. 김승환 전북 교육감에게 공개한 문건 중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국회를 견제하기 위해 여야 의원들의 신상자료 관리가 필요하다”고 국정원에 내려보낸 공문이 포함돼 있다. 이 공문의 보고처에는 청와대 정무수석실이 포함돼 있어 사찰 논란이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로 점화한 것이다.
본관 현관에 ‘정치 중립’ 입간판 세워
국정원이 2010년 3월 31일 작성한 문건 ‘명진 봉은사 주지 관련 각종 추문 확인 결과 및 평가’에는 “승려 생명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확실한 물증이 부족하지만 종단 차원의 주지직 퇴출 유도와 함께 면밀한 동향 점검 및 보수언론을 통한 부조리 실태 부각 등 입체적 압박 전개가 바람직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를 근거로 명진 스님은 박형준 후보가 정무수석 때 자신의 봉은사 주지 퇴출 공작에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 후보는 "이 시점에 이 사안을 무리하게 내게 연루시키려고 하는 것은 선거공학 냄새가 짙다"고 말했다.
하태경 정보위 야당 간사는 “국정원이 대법원 판결을 구실로 개인과 관계없는 공문서까지 공개하고 있다”며 사찰문건 공개를 이용한 정치 개입이라고 공박했다. 하 의원은 박지원 국가정보 원장에게 “박 후보와 관련된 사찰문서가 또 있냐”고 질문했으나 박 원장은 하 의원에게 “그런 건 묻지도 마라”고 답했다고 한다. 박 원장은 “60년 동안 쌓인 서버를 열면 무엇이 나올지 알수 없기 때문에 국정원 직원들에게 사찰문서를 열람하려면 모두 내 결재를 받으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고 정보위 의원들이 전했다. 박 원장은 정보위 의원들에게 “박근혜·이명박 정부에서 나도 사찰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 중에 하나이지만 나는 내 사찰 자료도 안 봤다”고 엄정 관리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국정원 사찰문서를 공개하려면 두 가지 경우에만 가능하다. 첫째, 사찰 피해자가 직접 청구하는 것이다. 이 경우 국정원은 본인에게만 문건 사본을 보여줄 수 있다. 피해 당사자가 사찰문건을 언론에 공개할지는 본인의 의사에 달렸다.
국정원이 당사자에게 공개하는 경우에도 국가안보에 관련되는 내용이 있으면, 그 대목은 공개하지 않거나 일부를 지우고 내준다. 일부 신청자가 지운 것을 문제 삼은 경우도 있으나 모두 보고 싶으면 소송을 내 대법원에서 다시 확정판결을 받아 와야 한다.
지금까지 국정원을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해 사찰자료를 받아낸 사람은 KT 해고노동자인 조태욱씨와 명진 스님, 김승환 전북교육감 등이다. 조태욱씨는 KT노조위원장 후보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국정원이 KT노조위원장 선거에 개입하고 민노총 탈퇴를 유도한 것은 조씨의 정보청구를 통해 사실로 드러났다.
나는 새 떨어뜨리던 기관...이젠 앉은 새도 안 날아가
그러나 정보위 관계자들은 정보공개를 청구하는 사람이 크게 늘지 않고 있고, 청구했다가 취소하는 사람도 있다고 밝혔다. 과거 정보기관이 사찰을 할 때 약점을 캐내 적어놓았지만 증거 확인이 어려운 상태에서 오히려 당사자에게 2차 피해를 줄 수 있다. 그래서 “정보공개 청구를 했다가 가정파탄을 부를 수도 있다”는 조크 아닌 조크가 나온다고 말했다.
본인이 청구하지 않을 경우에도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재적의원 3분의2 의결을 거치면 국정원이 정보위에 보고할 수 있다. 그러나 3분의2라는 정족수 때문에 쉽게 의결이 이뤄지기는 어렵다. 국정원에서는 차기 정부의 국정원장이 들어서도 역대 정권의 사찰정보를 들여다보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불법행위의 공소시효가 지난 문서들은 파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정보위 관계자들이 말했다.
야당은 국정원의 불법사찰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는 물론이고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처벌의 공소시효(7년)가 남아 있는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의 사찰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원의 도청을 문제 삼아 처벌할 때도 공소시효 때문에 임동원·신건 원장만 형사처벌을 받았다.
국정원의 공식 입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 국정원이 사찰조직을 모두 없앴기 때문에 현 정부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국정원이 기능을 축소하면서 정보위 주변에서는 “옛날에 정보부와 안기부는 나는 새도 떨어뜨렸는데 요즘 국정원은 앉아 있는 새도 날아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정보위 의원들 중에는 “5·18과 세월호는 모든 문건을 공개하기 때문에 관련자들이 불만이 없지 않으냐”면서 “국정원 사찰자료도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해 공정하게 처리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북, 수학올림피아드 우수 학생을 해커로 육성
최근 국정원은 3년간 유예기간을 두고 대공수사국의 기능을 경찰에 이관하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국민의힘 쪽에서는 대공수사 역량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태경 의원은 대공수사권이 경찰로 넘어가도 국정원이 내사권을 가진다고 하지만, 북한 간첩은 해외정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경찰 수사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권은 독재정권 시절에 악명이 높았던 대공수사국에서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이 많아 수사권을 없앰으로써 얻는 대국민 인식 개선 효과가 크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국정원은 정치사찰을 중단하고 대공수사권 폐지로 생긴 여력을 대북정보와 사이버 보안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 기업들이 피땀 흘려 개발한 기술정보를 외국 해커들이 빼가지 못하도록 지켜주고 코로나 팬데믹과 테러·마약 정보 수집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커를 할 때 상대에게 패를 보여줄 수 없듯이 국정원은 이 분야에 관한 한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고 있는데, 질적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국회 정보위의 평가다.
세계에서 가장 해킹을 빈번하게 하고 잘하는 나라는 중국, 북한, 러시아로 꼽힌다. 국정원의 현황판에 이 세 나라와 관련된 해커들의 활동이 실시간으로 포착되고 있다. 북한은 컴퓨터 보급률이 세계 최하위 수준인데, 해킹은 금메달감이다. 수학올림피아드에 나가 우수한 성적을 낸 학생들은 남한에선 의대로 가지만 북한에서는 해커로 육성된다.
비트코인 가격이 한때 5만 달러를 돌파하는 등 큰 인기를 모으고 있는 가운데, 미국 법무부가 2월 17일 해킹을 통해 암호화폐를 빼돌린 북한 해커 3명을 기소했다. 북한이 사이버 해킹을 통해 비트코인을 가져갔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는 액수가 과장돼 있긴 하지만 실제로 많이 가져간 것은 사실이라고 정보위 관계자들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