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뭐하지?]③ 5G시대에 여전히 1970년대 모습인 마을이 있다고?!

2021-02-11 06:30
  • 글자크기 설정
지난해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코로나19가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민족 대명절 '설 연휴'에도 5인 이상 사적모임 금지 지침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부모님도, 친지도 찾아뵙지 못한 채 연휴를 보내야 하는 낯선 상황,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밖에 나가 놀고 싶다"고 칭얼대는 소리는 마음을 더 괴롭게 한다. 이래저래 커져만 가는 우울함을 달랠 방법 어디 없을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갑갑한 집 밖을 벗어나 거리 두기를 지키며 한나절 기분전환하고 올 수 있는 곳을 찾으면 된다. 테마파크도 좋고, '레트로 여행지'로 시간여행을 떠나 아날로그 감성을 느껴보거나,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호젓하게 '호캉스'를 즐기는 것도 괜찮다. 방역지침을 철저히 지키면서 돌아보는 국내 곳곳은 어쩌면 코로나 블루를 떨쳐내는 최적의 방법이 될 테니까.​ <편집자 주>
 

예스러움이 돋보이는 서천 판교마을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변화의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는 세상. 바야흐로 5G시대다.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일상에 맞추기도 힘든 요즘이다. 신조어는 쏟아져나오고, 하루만 뉴스를 안 봐도 세상과 단절된다.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이 세월이 태엽과 같다면 거꾸로 돌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불가능한 것에 매달려 시간을 낭비하긴 어리석은 듯도 하다. 그럴 땐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풍기는 '레트로 여행지'가 답이다. 충남 서천의 판교마을은 1970년대 어디쯤 머물러 있다. 옛 감성을 일깨우는 일등공신은 마을 곳곳에 남은 옛 폰트다. 극장과 쌀가게, 사진관, 주조장까지...해묵은 글씨 사이를 거닐자 옛 시절(필자는 그 시절을 경험하진 못했다)이 눈 앞에 펼쳐진다. 

복고(레트로)가 여행 트렌드로 자리 잡은 지는 꽤 됐다. 레트로부터 뉴트로까지 아우르는 여행 트렌드는 기성세대들의 잠든 추억을 깨우고, 요즘 세대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왔다. 수많은 곳이 있지만, 서천 판교마을은 진짜 '레트로' 여행지다.
마을에는 옛 시절이 그득 고여 있다. 마을을 거닐면 오래된 건물 따라 빛바랜 간판, 녹슨 철문, 옛 폰트가 말을 걸어온다.

첫인상은 그저 '한적한 시골, 허름한 마을'일 터. 하지만 이 마을이 원래부터 남루했던 건 아니다. 마을은 1930년에 장항선 판교역이 개통되며 성장했다.  충남에서 손꼽는 우시장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마을 인구도 8000명을 넘었다.

물론, 다 한때의 이야기다. 마을 일대는 철도시설공단 부지로 묶이며 건축 제한에 걸려 개발이 어려워졌고, 1980년대에는 우시장도 사라졌다. 그때부터 판교마을은 생기를 잃었고, 성장은 멈췄다.

많은 젊은이가 이곳을 떠났지만, 타지의 젊은이가 카메라를 들고 이곳을 찾는다. 개발되지 않은 마을은 옛 모습을 간직했다는 이유로 주목받는 판교마을.

어르신들은 그리운 시절을 추억하고, 젊은이들은 겪어보지 못한 예스러움에 호기심을 느낀다. 마을은 1시간이면 둘러볼 정도로 아담하다.

마을을 여행하는 더 재미있는 방법은 곳곳에 남은 옛 폰트를 찾아보는 것이다. 요즘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글씨들이 오히려 정감 있다.

◆창고가 주는 레트로 감성

레트로 여행의 출발지는 마을 어귀에 있는 농협 창고다. 장항선 판교역을 마주한 채 오른쪽으로 800m가량 걸어 내려가 고석주 선생 기념공원 뒤 샛길로 들어서면 등장한다. 

창고는 언제 세워지고 문을 닫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군데군데 벗겨진 페인트칠에서 세월의 흔적을 가늠해본다.

외벽 글씨가 흐릿하다. 순간 노안이 온 건가 의심했지만, 비단 나만 글씨가 잘 안 보이는 것은 아니란다. 자물쇠가 걸린 빨간 철문 위 "협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판매하자"는 표어는 교과서 속 새마을운동 포스터에서나 보던 폰트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표어나 포스터 그리기 대회에서 글자를 일정하게 맞췄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서천 판교마을 극장에 붙은 가격표가 눈길을 끈다.[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너희들이 옛 극장이 품은 그 감성을 알아? 

마을 오른쪽 끄트머리, 판교철공소 맞은편에 '공관'이라 불리던 극장이 있다. 새마을운동 당시에 설립됐다고 하니, 50대 중년 극장이다. 극장이 드물던 시절에는 인근 주민들도 영화를 보러 판교마을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어둑한 건물 뒤편, 영사기가 돌아가고,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웃고 웃었으리라.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1960~70년대 흥행작 포스터가 걸려 있고, 매표소 창구에는 영화 관람료 500원(일반 기준)이라고 표시돼 있다.

극장이 문을 닫은 후인 1990년대에 건물은 호신술 도장으로 탈바꿈했다. 입구 유리창에 붙은 '호신술' '쌍절봉' '차력' 등의 글씨에 위압감이 들기도 한다. 
 

서천 판교마을 극장은 호신술을 가르치는 도장으로 탈바꿈했던 듯하다.[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쌀가게와 사진관까지···삶 속에 녹아든 그땐 그랬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카메라를 든 젊은이들이 인증 샷을 가장 많이 남기는 곳은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을 인 적산가옥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동면(판교면의 당시 이름) 주민 5500여명을 쥐락펴락한 일본 부호 11명이 살았다고 한다.  일본어로 "천황폐하 만세" "쌀 주세요"라고 말해야 쌀을 얻을 수 있었다니, 참 씁쓸하기만 하다.

광복 후에는 우시장에 온 사람들이 묵는 숙소였다가 그 후 반쪽은 쌀가게, 반쪽은 사진관으로 바뀌었다. 

나무틀에 낀 유리창에 '쌀, 잡곡 일절' '사진관' 글씨가 여전히 또렷하다. 90년대, 내가 살던 고장에도 '쌀가게'는 있었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쌀 한 됫박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멍가게에 진열된 눈깔사탕이 그토록 먹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먼 옛날, 판교마을의 쌀가게와 사진관에서도 사람들의 순박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쌀 한 됫박을 사서 밥을 안치고 기억하고 싶은 날을 사진으로 남겼을 주민들의 일상을 함께하던 가게는 오늘날 먼 곳에서 찾아온 여행자를 맞아주고 있다. 

시간여행의 종착지는 판교마을 주조장이다. 이름하여 '동일주조장'이다. 서체는 모범생 아이가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듯 점잖은 폰트다. 바로 아래에 건물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TEL 45.'다.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대면 전화교환원이 전화를 연결해 주던 시절이 있었다는데, 당시 동일주조장의 전화번호로 보인다. 

삶의 고단함을 달랬을 주조장. 창 너머 2000년 12월이라고 쓰인 달력이 보인다. 이곳의 시간은 20여년 전에 멈춰 있지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토닥이는 감성마을이 돼줄 것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