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아방강역고-18] "북만주에서 오키나와까지" 고려제국 통치영역

2021-01-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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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유구···국기는 삼태극기

유구국 정체성···‘삼한지수(三韓之秀)’

조선과 유구 사이를 망친 악마는 왜구

홍길동은 유구 왕국의 혁명선구자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잊어버린 것 외에 새로운 것은 없다.
잊혀진 왕국 유구(琉球)의 역사를 대체로 구분하면 5단계로 나누어진다.

1. 해상무역 왕국의 황금시대(14세기~1609년)
2.중국-일본에 의한 제1차 이중 종속시대 (1609년~1879년)
3.제1차 일본의 단독지배시대(1879년~1945년)
4.미국-일본에 의한 제2차 이중 종속시대(1945년~1972년)
5.제2차 일본의 단독지배시대(1972년~?) 강효백, 『중국의 습격 –류큐로 보는 한·중·일 해양 삼국지』Human&Books 2012. 참조


◆한국을 사랑한 유구···국기는 삼태극기

유구는 독립왕국이었다. 12세기경 200여개 크고 작은 섬들이 점점이 흩어진 유구(류큐군도)의 최대 섬인 오키나와에서 유구 왕국이 탄생했다. 유구왕국은 한국(고려·조선)과 중국(명·청)에 조공을 바쳤다. 한·중·일 3국을 비롯한 비롯한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와 활발한 중개무역을 통해 400여 년간 융성했던 해상중개무역의 요충지였다.

지금 오키나와 현립 박물관에는 유구 왕국 왕궁의 정전에 걸려있던 ‘유구만국진량(琉球萬國津梁·유구 만국의 가교)’ 동종이 전시돼 있다. 거기에는 이런 명문이 세겨 있다.

琉球國者南海勝地也鐘三韓之秀以大明為輔車以日域為唇齒在此二中間湧出之蓬萊島也以舟楫為萬國之津梁,異產至寶充滿十方剎

유구는 남해에 있는 나라로 삼한(三韓·한국)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중국)과 밀접한 보차(輔車·광대뼈와 턱)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일본)과도 떨어질 수 없는 순치(脣齒· 입술과 치아) 관계이다. 유구는 이 한가운데 솟아난 봉래도(蓬萊島·낙원)이다. 선박을 항행하여 만국의 가교가 되고 외국의 산물과 보배는 온 나라에 가득하다.
 

(왼쪽)유구왕국(오키나와)의 국기, 삼태극기는 유구가 마한·진한·변한 삼한(한국)의 후예임을 상징한다. (오른쪽)빨간 타원 표시가 유구왕국(13세기~1879년)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현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유구국 정체성···‘삼한지수(三韓之秀)’

동종의 명문은 유구 국가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유구국은 고려제국부터 우리나라를 삼한(2)*으로 부르며 상국(上國)으로 모셨다. 유구국은 '한국의 빼어남(三韓之秀)'만 이어받았다며 한국의 후예라는 ‘자국의 정체성’을 명기했다.

반면, 중국과 일본과는 각각 보차(광대뼈와 턱)와 순치(입술과 치아), 즉 ‘자국과의 관계’만을 기록했다.

유구군도(류큐군도)는 일본에서 보면 남서쪽에, 중국에서 보면 동쪽에 있다. 한반도에서 봐야 정남쪽에 있는데 자신들을 ‘남해의 나라’로 규정한 것을 보면 정체성이 한국이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또, 유구가 1879년 일본의 병탄으로 망할 때까지 사용했던 국기, 삼태극기도 마한·진한·변한 즉 한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구국은 고려제국과 조선 성종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조공을 바치며 칭신했다.(『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45회 기록)

유구국 중산왕이 칭신하며 조공을 바쳤다. 유구국 중산왕 찰도(察度)가 옥을 보내어 표문(表文 신하가 황제에게 바치는 문서)을 바치며 신하를 칭하고, 왜구에게 사로잡인 우리 인구를 돌려보냈으며 조공으로 유황 300근, 소목(蘇木) 600근, 후추 300근, 갑(甲) 20부를 바쳤다. -『고려사』 1389년(창왕 원년) 8월


조선 개국 원년 1392년 9월 11일(음), 유구 국왕의 명을 받은 공식 사절단이 조선에 조공을 바치며 태조 이성계를 알현했다. 태조는 유구 사절단 대표에게 정5품, 수행원들에게 정6품에 준하는 대우를 베풀었다.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유구국(琉球國)의 사신과 오량합(吾良哈)(3)*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례했다. 유구국의 사신은 동반(東班, 문신) 5품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오량합은 서반(西班, 무신) 4품 아래 자리를 잡았으며, 그 종자(從者,수행원)들은 6품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유구국에서 조공을 바쳤다. 「태조실록」 1392년(태조 1년) 9월 11일

『조선왕조실록』은 유구가 40여차례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조선 제9대 임금 성종(재위기간 1469~1494년)은 해인사 팔만대장경 인쇄본을 유구 왕국에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슈리성 아래 있는 연못가의 한 건물이 대장경을 보관하던 장경판고였다.

특별히 올해에는 《대장경(大藏經)》을 내려 주셨으므로, 즉시 안국선사(安國禪寺)에 두고 만세토록 국가의 진기한 보물로 삼을 것이니, 손뼉치며 즐거워함이 지극하고 말로써 이루 미칠 수 없어 매우 다행하고 다행합니다. 「성종실록」 1493년 성종 24년 6월 6일

◆조선과 유구 사이를 망친 악마는 왜구

유구는 조선과의 조공무역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항구로 향하는 유구 조공선의 항해 루트는 ‘왜구’가 출몰하는 바다였다. 유구는 16세기 초 방침을 바꿔 조선에 직접 조공선을 파견하지 않고 규슈와 대마도의 상인을 매개로 한 간접무역 방식을 취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왜구들이 유구의 사신이라고 사칭하며 조선에 조공무역을 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리하여 유구가 조공을 바치면 이에 대한 답례로 조선이 사여를 주는 직접무역은 빈껍데기만 남고, 양자 사이에 왜구가 끼어드는 형태가 되고 말았다. 

유구국에서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을 때 조정에서 그 충의를 사모하여 멀리 온 것을 아름답게 여겨서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그 뒤로 후한 이익을 얻으려는 여러 곳의 왜인들이 반드시 유구국의 도서와 인장을 모조하여 그 사신이라 하고 오니.., 1493년 (성종 24년) 윤5월 28일

들으니 왜의 일족(一族)은 대대로 귀국(조선)에 귀부(歸付)하여 신하로 벼슬자리에 끼었는데 이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하며, 폐하(陛下 조선국왕)의 안부를 받들어 물어왔습니다. ‘근년에 유구의 사자(使者)라고 부르는 자가 조공선을 타고 조공을 한다.’ 하니, 이것은 왜가 만든 모서(謀書; 가짜 서류) 입니다. - 1494년(성종25년) 5월 21일



◆홍길동은 유구 왕국의 혁명선구자

홍길동 연구의 권위학자, 설성경 교수는 허균의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연산군에 의해 비밀리에 석방됐으며 홍길동이 진출한 율도국이 지금의 유구라고 주장했다.

설 교수는 유구 왕국의 혁명선구자의 아카하치(赤峰)의 별명은 홍가와라(洪家王)인데 그가 바로 홍길동이라는 논지를 펼치고 있다.(4)*

한국과 유구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 일례로 유구어로 엄마는 '움마' 라고 한다. 일본은 돼지고기를 구워먹는 문화가 없지만 유구는 한국과 같이 삼겹살 구이를 좋아하고 일본의 가부키는 얼굴에 화장을 하고 춤을 추지만, 유구는 우리의 안동 하회탈과 유사한 탈을 쓰고 추는 탈춤을 즐긴다.

그리고 고려시대 삼별초가 제주도를 탈출, 오키나와 본섬의 남쪽 우라소에성(浦添城)으로 가서 유구왕국을 세운 기초를 다졌다는 연구도 있다.(5)* 

2009년 12월 1일 오키나와 시립극장에서는 '고국의 고려전사 삼별초'가 공연됐다. 실제로 유구에서는 고려의 기와 양식과 문양이 동일한 기와가 발견되고 있고, 조선식 산성과 초가집, 칠기, 도자기 등 유적과 유물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고려제국부터 조선왕국 15세기 말까지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북만주(헤이룽장성), 남으로는 오키나와(류큐 군도), 동으로는 일본(왜국)등 광활한 육지와 해양영토를 직간접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서양을 하나로 통일했던 대원제국 하나만 빼놓고 송·요·금·명 등 대륙의 역대 중국 왕조의 판도와 견주어도 손색이 전혀 없거나 오히려 더 넓은 지배판도였다.

◆◇◆◇◆◇◆◇각주

(1)*강효백, 『중국의 습격 –류큐로 보는 한·중·일 해양 삼국지』Human&Books 2012. 참조

(2)*"삼한(三韓)은 만방(萬邦)의 우두머리이니, 많은 백성들의 영광입니다. 덕택은 사방의 오랑캐(四夷)에게 두루 미치며, 인풍(仁風)은 천지와 같으니 크도다. 만복이 진중함이여! 『성종실록』 1494 성종 25년 5월 21일 기사 참조

(3)*오량합은 올량합(兀良哈)이라고도 한다. 동만주(지금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남부)의 여진 부족으로, 이성계의 무력 기반을 이룬 세력이다. 오량합·올량합은 모두 ‘오랑캐’를 중국식 한자 발음으로 음차한 이름이다

(4)*설성경, 『홍길동전의 비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참조

(5)*『KBS』 역사추적 '삼별초 오키나와로 갔는가' 2009.4.20. 방송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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