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의 ‘고별 방한’을 끝으로 주요 2개국(G2, 미국과 중국)의 동북아 외교전이 마무리됐다.
지난 11월 말부터 이달 초까지 이어진 미·중 주요 외교인사의 방한은 미·중 패권 경쟁 속 한국을 각자의 우군으로 확보하려는 데 중점을 뒀다.
아울러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재가동을 위한 협력도 약속했다. 하지만 획기적인 북한 비핵화 해법 제안은 없었다.
중국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겠다면서도 “한반도의 운명은 남북 양측의 손에 주어야 한다”며 남과 북이 한반도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반면 미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남·북·미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면서 북한의 체제 변화 필요성을 시사했다.
북한의 비핵화 협상 카운터파트 ‘미국’과 혈맹관계인 ‘중국’ 모두 한반도 비핵화 협력 의지를 재확인하면서도 북한의 태도 변화를 해법으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北 실무진 협상 권한 확대하라”
비건 부장관은 지난 10일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진행된 강연에서 “지난 2년 반 동안 우리는 북한에 70년의 반복을 뒤로하고 새롭게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은 대화와 관여 대신 협상의 장애물을 찾는 데 주력했다”며 북한을 향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성과가 이어지지 못한 배경을 북한 협상팀의 ‘권한 부족’으로 제시했다.
비건 부장관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문제점은 카운터파트(협상상대)가 비핵화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상회담부터 시작해 실무자로 이어지는 ‘톱다운(Top down·하향식)’ 방식 협상의 한계점을 꼬집은 셈이다. 또 그동안 톱다운 방식으로 북한 비핵화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문재인 정부의 비핵화 정책에도 쓴소리를 낸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대미 정책 수립에 고심 중인 김 위원장을 향해 대미 협상 실무진의 권한을 확대하라는 조언으로도 해석된다.
바이든 미국 대선 당선인은 한반도 비핵화 협상과 관련 ‘실무협상’을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조건부 북·미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밝힌 바 있다.
바이든 당선인은 지난 마지막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김 위원장이 핵 능력 축소에 동의한다면 만날 용의가 있다”며 조건부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시사했었다. 또 미국 외교위원회(CFR) 질의응답을 통해선 실무 협상팀에 힘을 실어주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유일영도체제’ 北, 실무진 권한 확대 가능할까
비건 부장관의 대북 메시지는 바이든 정부가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실무협상부터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밟아가겠다는 의사를 명확히 드러낸 만큼, 북한도 권한이 있는 실무 협상팀을 구성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김 위원장을 최고지도자로 둔 유일영도체제로, 김 위원장의 권한을 실무진에 위임하면서까지 미국과의 협상에 나서지 않을 거란 지적도 존재한다.
국가정보원은 지난 8월 국회 정보위원회를 통해 김 위원장이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 등 일부 측근들에게 ‘위임 통치’를 하고 있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당시 대북 전문가들은 북한의 당 주도 국가 운영체제를 앞세워 국정원의 ‘위임통치’ 주장에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유일영도체제인 북한에서 위임통치는 비상체제에서나 가능한 것”이라며 “위임통치가 아니라 역할 분담이고 이는 김 위원장의 정치적 관리 용병술”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김 제1부부장이 대미(對美), 대남(對南) 등 대외사업 책임자 행보를 보이지만, 이는 모두 김 위원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때문에 북·미 비핵화 실무진이 북한 내 권위 있는 인사로 구성되고, 결국 김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거란 관측이다.
한편 비건 부장관은 내년 1월로 예정된 북한 노동당 제8차 대회를 언급하며 “우리는 북한이 지금과 그 사이의 시간을 이용해 서둘러 외교를 재개하기를 강력히 촉구한다”고 했다.
이어 “북한과 미국이 지속적인 관여와 어려운 절충이 필요하지만 막대한 보상을 받는 진지한 외교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바이든 당선인은 내년 1월 20일(현지시간) 미국 대통령 취임식을 통해 본격적인 대통령 행보에 나설 예정이다. 북한은 앞서 정초에 제8차 당 대회를 열겠다고 예고한 바 있어, 미국 대통령 취임식 전에 북한 최대정치행사 당 대회가 개최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이 당 대회 전에 ‘권한 있는’ 대미 실무 협상팀을 구성하고, 바이든 정부의 대북 정책 수립 전에 이를 발표, 미국과 대화를 통해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야 한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