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꿈꾸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한번은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도전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도 않은 평범한 젊은이가 불쑥 사표를 쓰는 결단을 내리고, 좋은 사람과 삶터를 찾고 만나, 쑥쑥 크고 있는 스토리 말이다.
도시든 농촌이든 누구나 자기가 사는 동네가 있다. 그 동네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드는 청년을 로컬 크리에이터(local creator)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지역(local)이라고 하면 서울·수도권에서 떨어진 지방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그렇지 않다. 서울 성수동, 문래동 역시 로컬이고, 여기를 기반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청년 누구나 크리에이터다.
이 글에 등장했던 크리에이터 중 김소영 캘리그래피(손글씨) 작가가 얼마 전에 한글 글씨체(폰트)인 ‘난설헌체’의 저작권을 등록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래, 이 친구가 있었지!”
평범한 청년이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가 스스로 비즈니스를 만들어 낸 이후 계속 도전 중인 스토리에 딱 맞춤한 인물.
코로나19 상황이 잠시 주춤했던 11월 12일 강릉으로 향해 그가 작업실로 쓰는 강릉시 홍제동 '글씨당'에 마주 앉았다.
그는 요즘 ‘핫’한 캘리그래피 작가이자 강원도의 대표 로컬 크리에이터 중 한 사람이다. 2시간 넘게 대화를 주고받는 내내 걸걸하고 힘찬 목소리, 밝은 기운, 생기가 넘쳤다. 그는 마치 딕션(diction·정확하고 유창한 발음)이 좋은 래퍼 같았다.
마치 랩을 하듯 김 작가는 실업계 여고생이 공장 노동자에서 작가가 되기까지 과정, 앞으로 하고 싶은 일 등을 쏟아 냈다. 기자와 작가가 한 '티키타카'(공을 짧고 빠르게 주고받는 축구 기술)식 대화를 최대한 가감 없이 적었다.
그가 대표인 1인 기업 글씨당은 회사 이름이자,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센터장 한종호) 지원과 그가 모아둔 돈을 합쳐 1년 전 마련한 작업실 겸 주거 공간이다. 70년 된 집을 고친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이승재 위원(이하 위원)= 글씨당 툇마루 볕이 좋다.
김소영 작가(이하 작가)= 처음에 집을 살 때 이런 게 있는지 모르고 샀다. 건물을 올릴까 생각을 했었는데 (오랫동안 덧대온) 조립식 설비들을 뜯어보니까 툇마루도 있고, 기둥도 있었다. 그대로 살려서 살아보려 최소한으로 고쳐서 글씨당을 만들었다.
위원=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계속 붙여 놓은 걸 떼어내니까 본질이 나타난 건가?
작가= 그렇다. 최대한 안 고치려 했다. 지붕도 원래 있던 걸 뒀다. 제가 지금 30대 초반이다. 그런데 이 집이 70년이 됐다고 한다. 시간의 가치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 만들어서 살아보고자 했다. 제가 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위원= 처음엔 빈 집이었나?
작가= 빈 집이었다. 골조, 마루, 지붕 등만 살리고 그 외 것은 다 쳐냈다. 동네 분들도 좋아해주신다. 동네 어르신들도 글씨당이 들어와서 동네가 산다고 말씀해주신다. 여기로 옮기고 나름 유명세도 탔고 작업 범위도 더 넓어졌다. 공간의 상징성이 있다고 느꼈다. 글씨당으로 온 게 제 인생의 전환점이다.
위원= 강원창조혁신센터는 어떤 도움을 줬나?
작가= 이 공간으로 오기 전에 글씨와 관련된 여러 일을 하고 있었다. 강릉이라는 도시가 글씨와 잘 어울리지 않나. 해볼 수 있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전업 작가로 비즈니스 모델이 나오기가 힘들었다. 그걸 센터에서 해결해줬다. 비즈니스 모델을 정립하고 방향성을 찾게 됐다. 예산도 두 차례에 걸쳐 총 3000만원을 지원 받았다. 첫 1500만원은 영상 콘텐츠 구축과 교재 제작에 썼다. 두 번째 1500만원은 글씨당을 만드는 데 썼다.
글씨당으로 옮기게 된 데는 센터에서 보았던 여러 사례들의 영향이 컸다. 재생 공간을 기반으로 잘 된 사례들을 보면서 (오래된 빈 집 같은) 재생된 공간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센터의 금전적 도움도 의미가 있지만 공간의 가치와 맥락을 알게 해줬다.
위원= 로컬 크리에이터로서 혁신센터의 의미는 뭔가?
작가= 제가 강릉에 온 지 6년이 됐고 글씨당은 1년 정도 됐다. 센터와 만난 지는 3년 정도다. 혼자 일하다 센터를 만나게 되면서 ‘로컬 크리에이터’라고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내 활동이 새롭게 발견되고 가치를 부여 받게 된 거다. 방향과 맥락이 맞아서 ‘서로를 돕는다’는 느낌이다. 서로의 가치에 동의하고 그게 우리 지역에도 도움이 된다면 더 큰 가치를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원래 하던 일이 센터를 만나고 조금 더 커질 수 있었다.
글씨당과 강원센터의 얘기는 일종의 몸풀기, 김 작가는 본격적으로 실업계 고교 출신 공장 노동자가 작가가 된 전후사정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위원= 어떻게 캘리그래피를 시작했나? 좋아하는 일이 비즈니스가 된 건가?
작가= 저는 원래 이 일로 돈을 벌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캘리그래피 작가가 되기 전 경기도 파주의 LG디스플레이 공장에서 일했다. 의정부의 한 실업계 고교를 졸업한 19세부터 시작해 일 3교대 근무를 7년 정도 했다. 쉽게 얘기해서 공장 노동자였다.
공장 일을 하면서도 회사 근처 전문대학(두원공과대)을 다녔다. 전공은 브랜드디자인을 했는데, 캘리그래피는 취미로 배운 거였다. 회사 다닐 때 정말 다양한 취미를 가졌다. 바리스타, 가죽공예 등 다양한 걸 해봤다. 뭘 잘하는지 찾으려 다 배워보고 자격증도 다양하게 땄다. 결국 글씨가 제일 나랑 잘 맞았다. 3교대를 하면, 24시간 중 8시간을 근무한다. 남는 16시간 중에서 항상 7시간을 잤고 남는 9시간에 배우고 싶은 것들을 배웠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배운 게 캘리그래피하는 데 도움이 됐다. 디자인에서 캘리그래피도 나오고 캘리그래피에서 비즈니스모델까지 갈 수 있었던 게 대학 덕분인 것 같다. 대학을 다닐 때 간판 글씨를 보며 ‘멋있다’ ‘나도 저렇게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위원= 공장에서는 무슨 일을 했나?
작가= 디스플레이 제품 품질 관리를 했다. 디스플레이를 본다는 게 정말 일률적이고 반복적인 일이다. 좋은 회사였고 선배들도 무척 잘해줬다. 하지만 계속 할 일이라는 느낌을 갖기 힘들었다.
위원= 몇 년을 다녔나?
작가= 2008년 11월에 입사했고 2015년에 퇴사했다.
위원= 그 시기는 디스플레이 경기가 좋아 연봉도 많이 받았을 텐데.
작가= 그렇다, 연봉도 꽤 많았고 회사 지원으로 단기 중국 유학도 다녀왔다. LG 공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일을 하다가 결혼하고 아기 낳고 산다. 근데 저는 그게 싫었다. 일률적으로 반복되는 작업도 싫었고, 돈을 벌었지만 사는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갑자기 퇴사를 하게 됐다. 더 이상 그렇게 살기 싫어서 죽을 각오로 퇴사를 했다. 미련도 없었다. ‘어차피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삶인데, 나가서 재미없고 의미를 찾지 못하면 그냥 죽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었다.
위원= 퇴사 후 뭘 할 계획이었나?
작가= 계획 없었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 지치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부모님이 강원도 동해시에 자리를 잡으셨으니까 ‘와서 카페나 하면서 편하게 살아라’ 하셨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 좀 쉬고 싶었다. 그때가 25살쯤이었다. 그만두고 부모님과 같이 살았는데, 답답했다. 모았던 돈으로 강릉에 집을 얻어서 나왔다. 오롯이 혼자 살아보고자 했다. 항상 미련 없이 살았다. ‘해보고 안 되면 말고’ 하는 생각이었다.
위원= 캘리그래피 작가를 목표로 한 건 아니었나?
작가= 그냥 좋아서 취미로 하던 거였다. 강릉에 혼자 살면서 구직 사이트에서 일자리를 구해 안목해변 카페에서 알바를 했다. 그 카페 사장님이 강릉 토박이였는데 제가 손글씨를 쓰는 걸 보고 캘리그래피 강좌를 열어보라고 추천해주셨다. 그게 시작이었다. 원데이 클라스를 했는데 30만원을 벌었다. 카페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40만원 벌 때였다.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카페 2층에 공간을 얻어서 일을 시작했다.
위원= 사람 복이 있었나보다.
작가= 그렇다. 강릉이 외부인에게 배타적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니다. 저는 처음부터 좋은 분들을 만났다.
위원= 처음에는 무료로 글을 써줬다고 하던데.
작가= 1호 작품으로 어떤 가게 간판을 써드렸는데, 그 가게 사장님이 너무나 행복해 하셨다.그때 캘리그래피가 가치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떤 사람은 ‘간판쟁이’라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내 가치에서는 그것보다 큰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처음에는 돈도 받지 않았다. 강릉에서 열리는 행사나 축제에 한복 입고 가서 무료로 글씨를 썼다. 초등학교, 중학교에 가서 글씨를 그냥 가르쳐줬다. 일이라는 생각 없이 재밌게 논다고 생각했다. 저는 논다고 생각하고 한 일들이었는데 베푼 거다.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적어주며 놀다 보니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해주는 사람이 됐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착한 사람으로 봐주면서 진짜 그렇게 살게 됐다. 선순환이다. ‘내가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감사했다.
김 작가는 요즘 조선시대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년)에 푹 빠졌다. 허균의 누이, 불행한 삶을 산 천재 시인에 대한 오마주(경의)를 표하려는 거다. 특유의 글씨체, 난설헌체를 만들고 있다.
위원= 왜 허난설헌인가?
작가= 허난설헌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를 너무 좋아한다. 불쌍하고 안타깝고 다시 꺼내주고 싶다. 그래서 허난설헌을 알리려 한다. 난설헌은 아이 둘이 모두 죽고 남편이 바람나고 기구한 삶을 살았던 당시 내 또래 여성이었다. 신사임당과 달리 허난설헌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허난설헌을 알리는 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의미가 없으면 돈을 버는 일이라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위원= 난설헌체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
작가= 난설헌은 한자를 쓴 사람이다. 한글 글씨체가 없고 남아있는 것들은 다 한시다. 그걸 한글로 번역한 걸 보면서 공부한다. 사람들한테 글씨를 가르칠 때 “귀엽게 쓰세요”, “투박하게 쓰세요” 이렇게 가르쳤다. 그렇게 느낌만으로 전달하니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고 표현이 안 되더라. 그래서 ‘글씨체를 만들어서 더 잘 가르쳐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체를 만들기 시작한 건 그 이유 때문이다. 돌담체, 솔방울체 등을 만들었다. 그러다 제가 제일 잘 쓰고, 영감을 받은 ‘난설헌체’를 만들게 됐다. 난설헌이 한글을 쓰진 않았지만 제가 시에서 얻은 마음을 담은 한글 글씨체에 ‘난설헌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난설헌체’는 이미지적인 것이고 난설헌에 대한 제 마음을 담은 글씨체다.
위원= 글씨라는 물리적 부분 말고 문장, 글귀는?
작가= 저는 매일 겪은 일 중에 인상 깊었던 일을 사진과 함께 적어 놓는다. 하루에 하나씩 쓴다. 그런 일기에서 문장이 나온다. 내 생각이 반영된 함축된 문장이 나온다. 그 압축된 문장이 사람들로 하여금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읽는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 맞게 대입해 각자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카피나 슬로건, 시와 같은 느낌이다. 저는 함축된 문장을 좋아한다. 길게 해석되어 있는 글들은 정보성은 강하지만 다른 해석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짧은 한 줄은 열려있다.
위원= 글 쓰는 퍼포먼스도 하고 있다.
작가= 젊은 여자가 붓을 들고 나와서 퍼포먼스 공연을 하는 것은 전무후무하니까 더 특별해진다. 배우지 않고 무작정 시작했다. 가르쳐줄 사람도 없었다. 2018년 강릉 단오제 포스터 글씨를 썼는데, 단오제 본행사 무대에 서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강릉 토박이만 할 수 있다며 처음엔 안 된다 했다. 계속 부탁해 결국 10분을 받았다. 그게 하나의 포트폴리오가 됐다. 퍼포먼스를 하면 그 자리 분위기를 고취시킬 수 있다. 그게 정말 의미 있다. 행복한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위원= 앞으로 뭐 하고 싶은가?
작가= 사랑하는 만큼 일을 하게 되더라. 내 가족을 사랑하면 내 가족을 위한 일만 하게 된다. 제 경우 강릉을 사랑하니 제가 강릉을 위한 일들을 하게 되더라. 국가를 사랑한다면 국가를 위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저는 세계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한글 콘텐츠를 기반으로 해서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위원= 지역에 대한 사랑을 세계로? 알파벳 폰트도 생각하나?
작가= 난설헌체를 최종적으로 등록하기 위해선 2000자를 써야 한다. 그런데 알파벳은 더 쉽다.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의 조합이라 글씨를 많이 써야 하는데 알파벳은 A부터 Z까지 쓰면 끝이다. 내년 초 글씨체가 나올 예정이다.
<정리=박하늘 인턴기자>
P.S. 김 작가에게 허난설헌체 사진을 추가로 요청해 받았다. 겸사겸사 지금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청춘들에게 주고 싶은 말을 적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아래 작품을 보내왔다. "누구에게도 완벽한 정답은 없다. 각자의 입장과 환경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