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사고가 많은 건설현장 관리에는 상명하복식 문화가 필요하다. 관리체계가 명확하지 않으면 후임자 문책도, 현장 컨트롤도 안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하평등한 관계는 '선진문화', 상명하복 한국식 조직문화는 '악습'으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때론 '꼰대' 같은 문화가 더 필요한 곳도 있다."
"직급 파괴에 큰 의미를 두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보수적인 업계에서 직급 파괴가 논의되고 변화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직급에 관계없이 평등한 기회를 준다는 점은 기업 대내외적으로 긍정적 이미지를 준다."
문제는 보수적인 건설업 문화와 직급 파괴가 처음 도입된 미국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식 문화가 상충되면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익명을 요구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외국계 컨설팅사들이 직급 파괴 도입을 촉구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분별없이 받아들인 측면이 있다"면서 "마치 사대주의처럼 한국식 조직문화는 '꼰대'로, 미국식 수평체계는 '선진문화'로 받아들여져 건설현장에서 관리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토로했다.
18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현대건설은 최근 기존 5단계 직급을 2단계로 통합했다. 사원과 대리를 매니저로, 과장·차장·부장을 책임매니저로 변경했다. 현대차그룹이 지난해부터 시작한 '수평적 관계에 따른 상호 존중 조직문화 만들기'의 일환이다. GS건설도 올 초부터 부장·차장·과장·대리·사원으로 나뉘어 있는 5단계 직급을 부·차장급은 책임, 과장 이하는 전임으로 하는 2단계로 바꿨다. GS건설 관계자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조직문화를 만들기 위한 시도"라면서 "호칭 개편과 함께 복장도 자율화됐다"고 말했다.
HDC현대산업개발은 지난해 5단계 직급을 3단계로 축소한 뒤 모든 팀원의 호칭을 매니저로 통일했다. SK건설 역시 부장 이하 직위 호칭을 '프로'로 바꿨다. 직원들에게 전문성과 주인의식을 심기 위해서다. 대림산업은 부장급 이하 7단계로 촘촘했던 직급을 4단계로 줄이고, 임원 직급 체계도 5단계에서 3단계로 축소했다.
현장에서는 엇갈린 반응이 나온다. 직급 개편을 마친 A건설사 매니저는 "회의를 할 때 선임들에게 좀 더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서 "선진화된 경영시스템을 도입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반면 비슷한 경력의 또 다른 관계자는 "창의적이고 수평적인 문화가 필요한 곳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면서 "호칭만 '프로'로 바뀐다고 전 직원이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건 아니다. 경험과 연륜이 필요하고, 현장사고가 많은 건설업에서는 특히 상명하복식 책임관리와 긴장감이 필수"라고 말했다.
앞서 직급 파괴 실험을 했던 건설사 가운데 기존 호칭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실제 한화건설은 2012년 사원은 '님', 대리부터 부장까지는 '매니저'로 불렀지만 3년 만인 2015년께 전통적인 직급체계로 돌아왔다. 이 회사 관계자는 "안전이 중요한 건설 현장 특성상 서열이 갖는 긴장감이 필요했다"면서 "직급이 애매하다 보니 외부업체와 소통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외국처럼 어렸을 때부터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학습하는 것도 아니고, 유연한 소통을 기대한다면서 정작 수평적 소통체계를 '지시' 받는 입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면서 "특히 '님'문화로 조직문화가 느슨해지면서 현장에서는 관리감독도 잘 안 되고 사건, 사고도 늘고 있다는 불만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직급 단순화 탓에 승진과 임금 등 동기부여를 상실할 수 있다는 점도 최근에는 단점으로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