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35층 룰’은 역린이었다. 박원순표 도시계획의 상징이자, 재건축 규제에 대한 반발의 근원이었다. 여당 대권주자 중 한 사람이었던 정치인 박원순의 입장에선 도시계획 철학과 현실 정치 사이에서의 외줄타기 문제였다.
35층 룰의 탄생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2011년 10월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박원순 전 시장은 곧바로 자신만의 도시계획 틀을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오세훈 전 시장의 한강 르네상스 계획이 워낙 색이 짙어, 박 전 시장 자신의 컬러를 다시 입히는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박 전 시장이 35층 룰의 명분으로 내세운 건 500년 도읍이란 역사·문화를 가진 서울에 걸맞은 도시계획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한강변 재건축이 단순히 주택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입체적인 도시계획의 일부였다는 게 박 전 시장의 논리다. 반박할 근거를 찾기 어려운 강력한 명분이었다.
당시 부동산 시장 상황도 35층 룰을 받아들이기에 유리했다. 오 전 시장은 르네상스 계획을 통해 압구정과 여의도에 70층 이상의 초고층 아파트를 지으려고 했다. 주거지역을 상업지역으로 용도변경해 1000%의 용적률을 적용해주는 대신 40%에 가까운 대지를 조합이 시에 기부채납하는 조건이었다. 초고층 계획에 환호했던 조합은 절반 가까운 대지를 내놓아야 한다는 대목에서 손사래를 쳤다. 시간이 갈수록 값이 오르는 대지와 감가상각되는 건물(용적률)을 맞바꾸는 건 바보 같은 거래였다. 조합과 시가 지루한 공방을 하면서 르네상스 계획은 자연스럽게 사문화돼 가고 있던 차였다. 랜드마크 계획의 핵심이었던 용산역세권 개발사업도 좌초된 이후였다.
35층 룰이 첫 적용된 재건축 단지가 현재 한강변 최고가 아파트인 '아크로 리버파크'다. 2012년 당시 신반포1차 재건축 조합은 49층 초고층 재건축을 추진했으나 35층 룰에 걸려 결국 38층으로 심의를 통과했다. 1층 필로티 등을 감안해 세 개 층을 높인 것이다. 이후 한강변 재건축엔 예외 없이 35층 룰이 적용됐다. 이촌동 첼리투스 등 50층 이상의 재건축은 35층 룰이 만들어지기 전 건축심의를 통과한 단지다.
문제는 재산권을 침해당했다고 생각하는 재건축 조합의 반발이다. 40만 가구의 반발은 대권을 생각하는 정치인 입장에선 상당한 부담이었다.
박원순 전 시장은 35층 룰의 출구전략을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자신의 철학이 담긴 도시계획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양자택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서울시 내 박 전 시장 주변의 참모들이 이 같은 기운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다수의 서울시 고위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실제 박 전 시장은 35층 룰을 계속 고수하긴 힘들 것이란 고민을 여러 차례 밝혔다.
문재인 정부 들어 박 전 시장은 출구전략을 본격적으로 고민했다. 강남을 중심으로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공급확대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때가 무르익은 것으로 박 전 시장과 주변 참모들은 판단했던 것 같다.
이후 용도별 용적률 체계를 규정한 현행 국토계획법을 개정해 공급을 늘리고 자연스럽게 35층 룰도 완화하겠다는 묘안이 도출됐다. 일반주거지역에선 용적률 300%-건폐율 20%를 기준으로 최고 35층까지밖에 지을 수 없다는 게 35층 룰의 골자인데, 용적률 체계 자체를 바꾸면 35층 룰을 깨지 않고도 초고층 재건축이 가능하다는 묘안이다.
지난달 12일 문재인 대통령이 김현미 국토부장관을 불러 공급대책을 지시하면서 당정과 서울시 등이 참여하는 태스크포스팀이 구성됐다. 서울시 정책라인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박 전 시장 본인에게는 물론, 도시계획과 주택건축 등 서울시 정책라인 입장에서도 35층 룰은 역린이었다.
이 같은 배경을 놓고 보면 지난 4일 정부의 공급대책 발표에 서울시가 발끈한 것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부와 서울시가 갈등 관계인 것으로 비춰지자 박선호 국토부 차관이 5일 “용도변경을 통해 50층 재건축이 가능한 것”이라고 구체적인 설명을 했지만, 여론은 그렇게 사안을 꼼꼼히 따지지 않는다. 여론은 오히려 “35층 룰은 깨진 것”이란 단순명쾌한 정치적 수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짐작하건대 서울시 정책라인 입장에선 단순히 공급을 늘리기 위해 35층 룰을 깬 것처럼 비춰지는 게 싫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난 10년간 서울시가 고수해 온 도시계획 철학을 부정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번 공급대책을 서울시는 도시계획 수정의 연착륙 문제로 접근했던 것이다. 박원순 전 시장 부재가 서울시 정책라인 입장에선 이중부담이었을 게 분명하다.
정교한 조율이 필요한 상황에서 여당과 국토부는 정작 인허가권자인 서울시의 역린을 대수롭지 않게 툭 건드린 셈이다. 10년간의 고민이 열흘간 졸속으로 대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철저히 무시당했다. 누구라도 발끈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