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앞서 같은 날 오전 청와대 본관에서 박 원장을 비롯, 이인영 통일부 장관·김창룡 경찰청장 대한 임명식을 열고 남북 관계 복원과 국가 치안을 당부했다.
전날 국회 정보위원회는 비공개 전체회의를 열고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박 원장에 대한 인사청문 경과 보고서를 채택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곧바로 임명을 재가하면서 야권이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이번 임명으로 현 정부는 문 대통령의 ‘임명 강행’은 역대 정권 가운데 최다를 기록하게 됐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시작으로 장관급만 20여명에 달한다.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여당이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뒤로는 안하무인이 말도 못 한다”면서 “개원 협상에서도 느꼈지만 최근 대정부질문에서 총리나 장관이 보인 오만불손과 청문회 자료 미제출 등 누가 청문을 하고 받는 사람인지 모를 정도의 도발”이라고 성토했다.
하루에 두 번 입장 발표한 靑…남북 대화 재개 의식한 듯
박 원장에 대한 논란의 핵심은 주 원내대표가 제기한 ‘4·8 이면합의서’ 의혹이다. 주 원내대표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박 원장이 북한에 3년간 총 30억 달러를 지원하는 ‘4·8 남북 경제협력 합의서’를 이면 합의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청와대는 이와 관련해 하루에 이례적으로 두 차례나 입장을 내며 발빠르게 대응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날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야권의 의혹 제기에도 임명을 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국정원, 통일부 등 관계 기관을 대상으로 파악한 결과 이른바 이면합의서 문건은 정부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문건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도 오후 춘추관 브리핑을 통해 “야당이 30억 달러 이면합의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데 왜 박 원장을 (문 대통령이) 임명했느냐고 따지고 있다”면서 “그래서 그 문서가 실재하는 문서인지 국정원과 통일부 등 관련부처를 모두 확인했다”고 밝혔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야권의 의혹 제기에 대해 ‘법적 조치나 수사 의뢰가 있을 수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저희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청문회에서 이미 박 원장이 ‘수사를 통해 밝혀야 겠다’고 이야기한 것으로 안다”면서 “그리 돼야 하지 않나 싶다. 그것은 야당도 동의할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도 “국정원, 통일부 등 이라고 했는데 ‘등’에는 청와대도 포함된다”면서 “청와대에도 이면합의서는 없다는 얘기다. 있었다면 박근혜·이명박 정권 때 가만히 있었겠느냐”고 반문했다.
실제 박 원장은 지난 28일 인사청문회장에서 주 원내대표에게 “면책특권에 숨지 말고 공식화하면 수사의뢰를 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박 원장은 “언론 인터뷰 내용 등에 대해 위법성을 검토해 법적 책임을 묻겠다”면서 “허위·날조된 것으로 법적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청와대가 박 원장의 임명과 이면합의서 의혹에 대해 속도를 낸 것은 남북 대화 재개를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당초 박 원장에 대한 ‘깜짝 발탁’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박지원 손자에 무릎 굽힌 文, 2012년 전대 후보 세 명 靑에 한 자리
이날 청와대에서 진행된 임명식에는 2018년 부인과 사별한 박 원장의 딸과 손자가 함께해 눈길을 끌었다. 문 대통령은 임명장을 수여한 뒤 가족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박 원장과 함께 온 손자에게는 무릎을 굽혀 꽃다발을 건네고 악수를 청했다. 박 원장의 손자에게 전달된 꽃다발은 신과 성실의 의미를 지닌 헬리오트로프와 신뢰를 의미하는 송악과 아게라덤으로 구성됐다. 문 대통령은 박 원장 손자의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기도 헀다.
문 대통령은 박 원장에 대해 “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주역이며 가장 오랜 경험과 풍부한 경륜을 갖춘 분”이라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두 분(박 원장과 이 장관)은 역사적 소명을 잘 감당해낼 것”이라면서 “남북 관계는 어느 한 부처만 잘해서 풀 수 없다. 국정원,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와 청와대 안보실이 ‘원팀’으로 지혜를 모아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명장 수여식 후 환담에서 박 원장은 “남북 관계의 물꼬를 트고 과거 국정원의 ‘흑역사’를 청산하는 개혁으로 보답하겠다”면서 “대통령 의지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정치 개입의 흑역사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박 원장은 이후 취임사에서도 “북한 비핵화 협상과 남북관계의 교착상태가 길어지는 가운데 강대국들의 패권경쟁 심화 등으로 안보상황 유동성이 커지고 있다”면서 “대한민국 안보와 한반도 평화, 민족의 화해ㆍ협력을 위해 그동안의 모든 경험과 지혜를 다해 노력하겠다. 역사적 책임감을 갖고 조국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시대적 소임을 반드시 해내자”라고 강조했다.
또한 국정원 개혁에 대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은 과감한 개혁조치로 잡음과 논란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국민들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면서 “국정원장으로서 직원들이 법과 원칙에 따라 당당하게 업무를 할 수 있는 국정원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이날 행사는 2015년 2월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권을 놓고 치열하게 3파전을 벌였던 당사자 세 명이 청와대에서 모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당시 문 대통령은 박 원장과 이 장관과의 당내 경선에서 승리해 당 대표에 올랐었다.
문 대통령은 이 장관의 배우자에게는 평화와 희망을 의미하는 꽃 데이지와 ‘반드시 행복해진다’는 꽃말을 지닌 은방울꽃을 전달했으며, 김 청장의 배우자에게는 말채나무와 산부추꽃으로 꾸며진 꽃다발을 선물했다. 국민과 소통하는 믿음직한 경찰, 국민을 보호하는 수호자의 상징성을 담아 이 같은 꽃다발을 선물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 대통령은 김 청장에게 “검·경 수사권 조정의 본질적인 목표는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민주적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라며 “수사체계 개편과정에서 국가가 가진 수사 역량의 총량에 조금도 훼손이 있어선 안 된다. 오히려 발전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