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 뽑을 자는 '글쎄요' 버릴 자만 보인다

2020-03-2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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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4·15 총선이 한국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민주화 이후, 실질 민주주의 시대로 성큼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까. 총선을 지배할 3대 이슈로 코로나 바이러스, 비례대표 위성정당, 정권 심판론을 꼽는다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가 완성돼 더는 얘깃거리가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거나. 그동안 숱하게 총선을 치렀지만 ‘민주’ 또는 ‘정치발전’이란 말조차도 들어보기 어려운 선거는 이번이 처음 같다.
하버드대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 교수는 공저 ‘민주주의는 어떻게 죽는가(How Democracies Die, 2018년)'에서 오늘날 민주주의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사람들과 투표함(ballot box)에 의해 죽는다고 했다. “과거 같으면 쿠데타, 계엄선포, 헌정 중단 같은 순간들(행위들)이 있어서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했음을 알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 없이 민주주의가 죽기 때문에 사전 경고음이 울리지도 않고, 따라서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부식(腐蝕)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새겨들어야 할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민주화 세력의 민주주의

한국 민주주의도 그런 징후를 보인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스스로 민주주의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의 주역이 됐다는 것은 패러독스”라면서 “위기의 본질은 한국진보의 도덕적·정신적 파탄이 그 원인이고, 그것이 불러온 결과”라고 했다(2019년 12월 9일,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학술회의 기조강연문). 그 징후들은 대중정치와 엘리트정치, 두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금태섭 의원은 4·15 총선 지역구 경선에서 낙마했다. 공수처 당론과 배치되는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속칭 ‘문빠’로 불리는 열성 당원들에 의해 배격당했다. '총선에서 민주당 빼고 투표하자'는 칼럼을 쓴 한 교수는 검찰에 고발됐다. 고발이 취하되긴 했지만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던 독재시절을 연상케 했다. 비례대표 위성정당 창당 과정에선 꼼수가 꼼수를 낳는 내로남불의 위선이 이어지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는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민주당과, 두 ‘자매정당’인 열린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 사이에서 과거 그들이 경멸해 마지않았던 친박·진박 감별처럼, 친문(親文)·진문(眞文)을 가려내야 할 판이다.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 포퓰리즘(authoritarian populism)으로 전락할 수도 있음을 경고한 사람은 하버드대 교수 야스차 뭉크(Yascha Mounk)다. 그는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공통점으로 몇 가지를 든다. “정치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고, 국민은 본능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고 주장하며, 책임을 묻고 비난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뭉크는 포퓰리즘 세력이 집권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훼손된 사례로 폴란드와 터키를 들었다. “그들은 국내외에서 적(敵)으로 지목한 세력들과의 긴장을 고조시켰고, 짝패들과 함께 법원과 선거관리위원회의 중립성을 훼손하고 언론을 장악했다.”('위험한 민주주의' 함규진 역, 2018년)

뭉크는 포퓰리즘을 막으려면 “포퓰리스트가 국민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국민이 거리로 나와야만 한다”고도 했다. 포퓰리즘에 대한 방어책으로 ‘저항’을 적시하고, 성공사례로 한국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을 꼽았다. “200만명의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탄핵을 주장했다”면서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끌어낸 일은 자유민주주의 옹호자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했다. 그런 정권에 우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만에 하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심화되면, 저항의 칼은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

권위주의 포퓰리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은 지지자들만 바라보고 하는 정치의 협애함과 지도자에 대한 맹신적 추종이 결합함으로써 진영(陣營)의 정치를 심화시킨다. 민주당의 이번 공천에서 친문은 100% 살아남았다. 열린민주당의 비례대표 후보엔 ‘조국 수호’를 외쳤던 인사들 일색이다. 한 후보는 “문재인 정부는 촛불이 만든 소중한 정부인데 적폐가 흔들고 있다. 어디서 함부로 (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들먹거리나, ···(그들에게) 정 할 게 없다면 한 줌의 똥바가지라도 뿌리고 오겠다”고 했다. 재판 중인 조국 전 법무장관을 조선조 개혁파 문신 조광조(1482∼1519)에 빗댄 후보도 있었다. 얀 베르너 뮐러 교수(프린스턴대)가 “포퓰리스트들에겐 추종세력만이 ‘진정한 국민’”이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이래서는 총선 후에도 정치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눈길이 야당에 이르면 더 막막해진다. 주어진 시점에서 민주정부를 끌고 가는 책임은 1차적으로 집권 여당에 있기에, 야당이 더는 지리멸렬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에 다들 비판을 자제할 뿐이다. 흔히 정치인들에 던지는 말이 있다. “당신이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는 알겠는데,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미래통합당에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심재철 원내대표는 울산시장 선거공작의 몸통이 청와대라는 게 드러나면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자신들의 ‘탄핵의 강’조차도 못 건너 4분5열된 처지에 이처럼 가볍게 탄핵을 얘기할 수 있는가. 명분과 전략 면에서 그게 과연 최선인가. 전직 대통령의 옥중서한 한 장에 당이 요동을 치고, 공천에서 탈락한 중진들이 연고지에서 무소속 출마를 불사하는 안주와 타성의 정당에서 뭘 기대할 수 있을까. 무능한 야당은 여당의 독주를 돕고, 독주는 정치의 극단화를 낳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셈인가.

민주주의의 가드레일 상용(相容)

최장집 교수는 전술한 강연문에서 “오늘의 한국정치를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말하는 상황까지 오게 된 데는 정치적 양극화가 그 중심에 있다”고 했다. 그는 양극화의 가장 부정적인 면으로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을 억압하는 집단적 힘들이 압도하고 지배하는 상황을 민주주의 중심으로 옮겨놓고, 급기야는 포퓰리즘으로 변질케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그는 “민주화운동 세대들이 있었기에 민주화는 가능했고, 보수에 대응하는 개혁의 이념과 가치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려는 진보의 정치 세력화가 가능했다”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통치체제(government)로서의 민주주의의 운영 차원에서 능력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본다. 그는 지금 필요한 것은 스테이트크래프트(statecraft·국가의 과업을 운영하는 기예)라고도 했다.

레비츠키와 지블렛 교수는 민주주의를 위기로부터 구해내는 행위규범(norms)으로 상호관용(mutual toleration)과 자제(forbearance)를 들었다. 1930년대의 유럽과 1960∼70년대의 남미 등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파당적 다툼으로 황폐화됐을 때도 미국 민주주의가 이를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관용과 자제 때문이었다고 했다. 관용은 상대를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것이고, 자제는 제도적으로 용인된 특권을 행사할 때도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이 둘을 미국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가드레일(soft guardrail)'이라고 했다. 가드레일이 약해져서 사회가, 정치가 극단화(양극화)되면 결국 민주주의는 죽는다는 것이다.

선거가 코앞인데 이제 와서 가드레일을 설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모든 나라가 그런 가드레일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축적된 전통과 경험, 문화가 있는 나라라야 가능할 터. 그럼에도 그 취지와 정신은 기억하자. 상대를 인정하고 수용하자. 진부한 표현이지만 소위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동거(同居) 없이는 민주주의가 완성되기는 어렵다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적·보편적 인식 아닌가. 나는 이를 상호관용이란 말 대신에 상용(相容)으로 표현하고 싶다. 상생(相生)에 앞서 상용이다. 그 기초 위에서 자제도 가능하다. 4·15 총선이 그 출발점이 되기를 소망한다. 유권자들의 현명한 한 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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