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KB국민은행 출범 18주년을 맞아 허인 행장은 기념사에서 오히려 위기감을 토로했다. 지난해 3조4391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한 국내 최대의 은행이 생사의 위기에 놓였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는 생존을 위해서는 금융과 비금융을 가리지 않고 KB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고 주문했다.
"우리는 더 이상 은행이 아니다."
올해 1월 국회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 관련 토론회에서 장현기 신한금융그룹 디지털R&D센터 본부장 역시 은행의 생존을 위해서는 금융업 측면에서가 아니라 기술 측면에서 대변신을 이뤄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 본부장은 은행이 금융의 테두리를 벗어날 정도로 혁신이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는 기존의 업무만으로는 더 이상 금융사가 생존할 수 없다는 통찰이 담긴 선언이다. 국내에서 금융업은 진입규제가 높은 대표적인 산업으로 꼽혀왔다. 은행업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인허가 절차를 거치고 막대한 자본금을 쌓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선수가 충원되지 않고 기존 은행끼리 경쟁 체제가 지속됐다. 높다란 담장을 쌓아놓고 '그들만의 리그'가 벌어졌던 셈이다.
그러나 이제는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지난 2017년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 대주주인 인터넷전문은행이라는 새로운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특히 인터넷전문은행인 카카오뱅크와 간편 결제 서비스인 카카오페이를 쥔 카카오가 눈에 띈다. 카카오뱅크는 출범 2년 만에 은행 계좌 개설자 수 1000만명을 돌파했다. 카카오페이는 결제·송금은 물론 환전·보험 상품 구매까지 애플리케이션(앱)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손바닥 안의 종합금융사로 발돋움했다.
이 같은 대형 ICT 기업만이 아니라 중소형 기업의 도전도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금융사의 전문 영역으로 여겨졌던 대출과 송금·보험 상품 판매 시장은 이미 신생 핀테크 기업이 한꺼번에 경쟁하는 무한경쟁 시대를 맞이했다.
금융사 고위 관계자는 "혁신기술의 발전으로 빅블러 현상이 가속되고 있으며 특히 금융권에서 이러한 사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며 "경쟁자가 어디서 출몰할지 모르는 무한경쟁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파악되며, 다른 업권과 융·복합의 필요성이 과거보다 커졌다"고 말했다.
◇담장 무너진 금융사도 다른 영역 진출···생존 위한 몸부림 지속
다른 산업이 금융사의 담장을 무너뜨렸듯이, 금융사도 무너진 담장을 넘어 다른 산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빅블러 현상이 금융업을 정조준하고 있는 만큼 기존의 위치만을 지켜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몸부림이다.
국민은행이 지난해 출시한 통신 서비스 리브엠(Liiv M)이 대표적이다. 리브엠은 저렴한 통신비에 약정 없이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취지로 개발됐다. 이는 단순히 금융사가 부수적 업무로 수익성을 창출하기 위한 시도보다는 모바일 금융 이용자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추진됐다. 그 결과 기존 통신업의 영역에 금융사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이례적 사례로 꼽힌다.
우리은행은 자신이 가진 데이터를 외부에 개방하고 이를 토대로 핀테크 업체가 개발한 서비스를 우리은행의 앱인 '위비뱅크'에서 제공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은행이 소비자가 모이는 플랫폼을 제공하고 핀테크 기업이 그 안에 입점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카드 업계 1위인 신한카드는 최근 신용카드 가맹점 정보를 활용한 자영업자(개인 사업자) 전문 신용평가 사업에 뛰어들었다. 간편 결제 업체의 대거 진출로 경쟁이 심해진 기존 결제 시장 밖에서 새 먹거리를 찾겠다는 목적에서다.
금융투자업권에서도 마찬가지다. 미래에셋대우는 모든 금융사의 통합 자산을 조회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동산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는 종합금융 플랫폼 '엠올(m.ALL)'을 서비스하고 있다. 금융사와 연관이 없었던 국토교통부의 실거래 시세까지 담아내고 있다.
허인 행장은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ICT 거인들도 금융을 제공하는 IT 회사로 변신에 힘쓰고 있다"며 "기존 모든 산업들이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처럼 금융업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변화의 물결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