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유통업계를 주름잡던 ‘롯데 자이언트’,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이 22일 마지막 길을 떠났다.
평생의 숙원이던 123층 마천루, 롯데월드타워를 한 바퀴 돌아 그의 마지막 행선지는 고향 울산 울주군.
이른 아침이지만 롯데 임직원 등 1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된 영결식은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장남 신정열씨가 영정을,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 신유열씨가 위패를 각각 들고 입장하면서 시작됐다.
고인의 부인인 시게미쓰 하쓰코씨와 신동주 전 부회장, 신동빈 회장,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등 가족들이 영정을 뒤따랐다.
우선 장례위원장인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이 신 명예회장의 약력을 소개했다. 황 부회장이 오른 무대 뒤편 대형 스크린에는 고인의 삶과 업적들이 담긴 영상들이 상영됐다. 황 부회장은 신 명예회장의 약력을 소개하면서 중간 중간 감정에 복받친듯 울먹이기도 했다.
이어 명예 장례위원장을 맡은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영전 앞에서 추모사를 낭독했다. 이 전 총리는 "우리 국토가 피폐하고 많은 국민이 굶주리던 시절 당신은 모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이 땅에서 사업을 시작했다"며 "당신이 일으킨 사업이 지금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이어 "당신은 사업을 일으킨 매 순간 나라 경제를 생각하고 우리 국민의 삶을 생각한 분이었다"며 "당신의 큰 뜻이 널리 퍼지도록 남은 이들이 더 많이 힘쓰겠다"고 말했다.
해외 일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사회자가 대독한 추도문을 통해 "창업주께서는 우리나라가 전쟁의 폐허 위에서 국가 재건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절 조국의 부름을 받고 경제 부흥과 산업 발전에 흔쾌히 나섰다"며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견인했던 거목, 우리 삶이 어두웠던 시절 경제 성장의 앞날을 밝혀주었던 큰 별이었다"고 애도했다.
신 명예회장의 생전 모습을 담은 추모 영상이 상영된 뒤, 신동주-신동빈 형제가 순서대로 인사말을 했다.
유족대표로 나선 신동주 전 부회장은 다소 어눌한 말투로 힘겹게 한국어로 더듬거리며 인사말을 전했다. 반면 고인의 생전 경영 방식대로 현해탄을 오가며 한-일 롯데 경영을 책임져온 신동빈 회장은 매우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말을 낭독해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신동주 전 부회장은 인사말에서 "아버님은 자신의 분신인 롯데그룹 직원과 롯데 고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힘써오셨다"면서 "저희 가족들은 앞으로 선친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살아가겠다. 창업주 일가를 대표해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롯데그룹 대표 자격으로 연단에 오른 신동빈 회장은 "아버지는 우리나라를 많이 사랑하셨다. 타지에서 많은 고난과 역경 끝에 성공을 거두시고 조국을 먼저 떠올렸고, 기업이 조국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평생 실천했다"며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기업인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배웠다"고 했다.
따뜻한 가장의 면모도 추억했다. 그는 "장남으로서 가족을 위해 많은 고생과 시련을 겪으셨다"며 "가족을 향한 헌신과 사랑을 보면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배웠다"고 전했다.
이어 "오늘의 롯데가 있기까지 아버지가 흘린 땀과 열정을 평생 기억하겠다"며 "역경과 고난이 닥쳐올 때마다 아버지의 태산 같은 열정을 떠올리며 길을 찾겠다"고 덧붙였다.
영결식 이후 운구 차량은 신 명예회장 평생의 숙원이던 잠실 롯데월드타워를 한 바퀴 돈 뒤 장지인 울산 울주군 선영으로 떠났다. 운구차가 떠나는 길을 롯데 식품·유통·화학·호텔서비스BU 계열사 임직원 1000여명이 도로까지 나와 배웅했다.
신 명예회장은 지난해 말 숙환으로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한 지 한달여 만인 지난 19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둔기리 별장은 1970년 댐 건설로 고향 마을이 수몰되자, 고향에 대한 애착이 컸던 신 명예회장이 건립한 것으로, 지역에서는 '롯데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신 명예회장은 고향 마을이 수몰되자 1971년부터 마을 이름을 딴 '둔기회'를 만들고, 43년 동안 매년 고향을 잃은 주민을 별장에 초청해 잔치를 열었다. 이 덕분에 매년 5월 도시로 떠난 이들은 고향 이웃들을 만나 옛정을 나눴다.
2013년 마지막 마을 잔치에는 최대 규모인 1600여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듬해 세월호 참사로 잔치가 취소됐고, 2015년부터는 교통혼잡 등 문제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석유선·서민지·조재형 기자 st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