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과 중국의 뒤바뀐 신세
미국의 세계적인 석학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2004년 자신의 베스트셀러 '유러피안 드림'에서 21세기에는 '아메리칸 드림'이 퇴색하고 유럽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급변하는 미래 사회에서 개인의 물질적 출세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아메리칸 드림'은 지탱할 수 없다고 했다. 대신 부의 축적보다는 삶의 질 ,그리고 개인주의보다는 다원적 협력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러피안 드림이 급속히 진행되는 세계화(globalization) 과정에서 험난한 세상을 인도하는 등불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21세기는 이미 상당히 흘러갔지만, 그의 전망과는 달리 유러피안 드림은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해 현실에서 주도권을 잡기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역주행을 하는 모습이다. 리프킨은 무엇보다도 긴 잠에서 깨어나 세계경제의 주도국으로 변신한 중국의 위세가 미국보다는 유럽을 먼저 흔들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한 듯하다. 현재 유럽은 몸집이 거대해진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 수출국가이다. 제조업 강국으로 자동차 산업만 보아도 곧 독일을 추월할 태세이다. 중국이 군사력, 금융, 혁신경제 분야에서는 아직 미국을 당장 따라잡을 만큼 큰 위협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미국은 과거 독일과 일본의 맹추격을 물리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중국의 도전을 물리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유럽은 중국과 비교할 때 여러 면에서 경쟁력을 급속하게 잃고 있다. 중국의 부상(浮上)이 21세기 유러피안 드림의 태동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차이나머니 그리고 일대일로의 진격
중국은 유럽이 자랑하는 최고의 공장들을 사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수년 전 중국 가전기업 메이디는 1898년 설립된 독일 최대의 로봇 업체인 쿠카를 50억 달러에 인수했다. 중국 자본이 설립 100년이 넘은 자국의 로봇업체를 삼키는 것을 두고 독일 조야가 크게 반발했지만, 차이나머니의 침투를 결코 막지 못했다. '제조 2025'를 내세우며 첨단 기술 사냥에 나선 중국에 맞서, 독일은 비(非)유럽연합(EU) 기업이 자국의 방위·기술·언론 관련 기업을 인수하는 것을 제한하는 법안을 강화하고 있다. '비EU 기업'이라는 표현 뒤에는 ‘중국’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도 하다.
중국은 유럽의 기업들만 아니라 세계 최대 내륙항인 독일의 두이스부르크(Duisburg)와 그리스의 최대 항만인 피라에우스(Piraeus)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글로벌 확장 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정책을 유럽 국가로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시진핑 국가주석이 그리스를 방문, 해운산업의 중심지이자 중국의 유럽진출 교두보가 될 피라에우스 항을 직접 들러 보기도 했다. 그리스는 포르투갈, 동유럽 국가들과 함께 일대일로에 참여하는 대표적 국가이다.
일대일로와 관련해 유럽에서 우군 확보가 필요한 시 주석은 지난해 3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국빈 방문했다. 당시 G7국가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중국과 일대일로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서방이 우려했던 것처럼 동유럽을 잇는 요충지인 슬로베니아와 접경한 트리에스테항, 북서부 제노바항의 개발에 양국이 협력한다는 조항 등 총 29개, 금액으로 25억 유로(약 3조2000억원) 상당의 상호 협력 분야가 명시됐다. 이탈리아 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정지출을 확대하려 하지만 부채위기를 우려하는 EU가 제동을 걸자 독자적으로 중국과 손잡으며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트리에스테항 등 중국에 내줄 항구가 유럽의 싱가포르 또는 홍콩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EU는 중국이 이들 항구를 장기적으로 상업적 목적을 넘어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선진 문화와 물질적 풍요의 상징이었던 유럽은 과거 미국과 더불어 세계 경제의 양대 축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급속하게 정치적 분열과 경제 침체의 길을 걷고 있다. IMF는 지정학적 위기 속에 유로존의 성장둔화가 장기화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중해를 통해 전쟁과 배고픔에서 탈출하는 난민이 대거 몰려오면서 EU 국가들은 이들을 자국에 수용하느냐 아니면 배척하느냐 논란으로 극심하게 분열되어 왔다. 즉, 유럽이 그동안 자랑하던 '다양성 속의 단결(unity in diversity)' 모습은 자취를 점점 감추고 있다. 미국은 경기 확장세가 126개월째 이어지며 세계 경제의 중심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EU 국가들은 연이은 재정확대 정책과 통화 완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저성장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변국에서 이민자가 쏟아져 자국의 일자리를 빼앗긴다고 불평하던 영국은 오는 31일 마침내 EU를 떠날 예정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유럽에서 이른바 브렉시트(Brexit)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U와 영국이 원만히 갈라지기 위해선 올해 말까지인 시한 안에 무역협정을 포함해 안보, 외교정책, 교통 등을 망라하는 미래관계 협상을 마무리해야 한다. EU와 영국의 미래관계 협상은 지난 3년여간 진통을 거듭한 영국의 탈퇴 조건에 대한 협상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EU는 회원국들의 산업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각종 법안 마련을 고심하고 있지만 까다로운 EU 공정거래법이 발목을 잡고 있다. 또 중국 기업의 5세대 이동통신(5G) 인프라 구축 사업을 두고 미·중 양측의 눈치를 보면서 EU 내 분열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홍콩의 민주화 운동이나 미국 의회의 홍콩 인권보호법안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침묵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런 데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방위비 증대 압박에 유럽의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마구 흔들리고 있다. 외부로부타 압박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내부 결속력도 갈수록 악화되면서 이래저래 유럽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2차대전 이후 유럽이 한마음으로 추진했던 정치·경제적 대통합은 이젠 요원한 꿈이 되었다.
노령화·저출산과 암울한 미래
유럽의 위기를 재촉하는 것은 또 하나가 있다. 바로 인구의 심각한 노령화와 출산율 급락이다. 유럽인의 평균 나이는 43세로 여타 지역의 평균보다 12세나 높다. 유엔은 2021년부터 유럽의 인구가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 2010년 정점이던 유럽의 노동인구(20~64세)는 10년 뒤인 올해엔 1200만명이 감소할 전망이다. 2035년에는 2010년 대비 5000만명이 줄어들 것으로 보여, 특단의 대책이 없이는 유로존 경제는 노동력의 급감으로 더욱 침체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특히 1.37에 불과한 남부 유럽 국가들의 평균 출산율은 심각하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은 세계 10대 저출산 국가이다. 중국은 '차이나머니 긴급수혈'을 통해 EU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남부와 동부 지역부터 서서히 공략하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해 3월 프랑스를 국빈 방문하면서, 에어버스 300대 구입 등 45조원 규모의 경협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시 주석은 그 자리에서 "단결하고 번영하는 유럽은 다극화된 세계를 원하는 우리 비전과 어울린다"면서 "중국은 언제나 유럽의 통합과 발전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를 다원화하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은 것이다. 미·중 무역 전쟁의 와중에서 유럽과 손잡겠다는 러브콜을 보낸 것이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유럽 공략을 위한 디딤돌을 놓기 위한 장기적 포석으로도 볼 수 있다.
지난 15일 무역전쟁을 벌이던 미·중 양국은 1단계 무역협정에 서명했다. 무역전쟁으로 잠시 움츠러들었던 차이나머니가 유럽을 휘젓고 다니며 자산 쇼핑에 나설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의 보복 관세 위협과 무역 협상의 화살이 유럽을 향할 것이다. 기타 고피나트 (Gita Gopinath) IMF 수석이코노미스트는 20일(현지시간) 다보스 포럼에서 유럽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되고 사회 불안도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의 새로운 무역 갈등은 유럽의 경제 성장을 심각하게 해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은 위기에 재정적으로 시의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한 '컨틴전시 플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유럽의 위기는 지속될 전망이다. 그리하여 '유러피안 드림'도 우리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