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방한과 한중관계의 명암

2019-12-26 20:56
  • 글자크기 설정
 

[주재우 교수 ]


[주재우의 프리즘]


지난  23일 한·중정상회담이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회담 이후 청와대는 내년 상반기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한국 방문이 ‘확정적’이라고 발표를 했다. 그러면서 2016년 사드사태 이후 중국 정부당국이 취한 ‘한한령’ 제재 조치가 완화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자체평가도 제시했다. 이는 새해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한·중관계가 새해에 새롭게 시작되기를 희망하는 우리 정부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확정적’에 불과한 시진핑의 방한 가능성을 청와대가 긴급하게 브리핑한 타이밍에 의아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발 속보가 우리 대통령이 홍콩, 신장, 티벳의 문제를 중국의 내정문제로 수긍한 사실이 보도된 직후에 나왔기 때문이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상황은 이러했다고 전한다. 시진핑 주석이 이 모든 문제들이 중국의 내정문제라고 하자 우리 대통령이 이를 ‘잘 들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을 뿐’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거짓말을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공산당 기관지의 속성을 이해하면 우리 측의 해명이 궁색하게 들린다. 회담의 발언 기록은 역사로 남는다. 그런 기록물에 대한 검열과 통제를 심하게 받는 중국 공산당의 기관지들이 회담의 발언을 잘못 기록할 가능성은 상식적으로 매우 희박하다. 설사 오류가 있었으면 이에 우리 정부 당국은 즉각적인 시정 요청을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외교에서 입장이나 발언의 기록은 그 나라의 입지와 레버리지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근거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중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리 정부(韓方)’가 이 모든 문제를 중국의 내정문제로 ‘생각(認爲)’한다고 보도되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 당국의 시정 요청은 없었다. 청와대 대변인이 중문학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기록이 정확했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인정하는 처사였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홍콩 사태에 대해 대통령이나 정부 당국이 함구해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를 보게 되었다. 다시 말해, 중국 유학생이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우리 대학의 구성원과 제도를 위해해도 정부가 이를 묵인하고 수수방관한 이유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중국의 ‘한한령’ 완화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번 대통령 방중 수행원들이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는 느꼈을 것이다. 왜냐면 최근 2년 동안 중국에서 우리의 지상파 방송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 전역에서 KBS 월드와 아리랑TV 방송을 시청할 수 없다. 한국드라마 또한 중국에 방송되지 않은 지 오래다. 이에 중국인들은 ‘안 보니까 궁금하지도 않다’고 한다. ‘눈에 안 보이면 마음도 떠나는 법’과 같은 반응이었다. 우리 가수의 단체공연도 금지된 지 오래다. 그런데 정부가 ‘한한령’의 완화 가능성에 대한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호언장담을 하고 있다.

또 하나의 방증은 올 하반기에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예정된 한·중경제장관회의가 실현되지 않은 사실이다. 올해 개최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중국의 경제장관 및 경제고위관료의 단체 방문이 허용되지 않은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밖에 없다. 물론 중국과의 많은 정부 차원의 연례회의가 모두 예정대로 개최되지는 않는다. 한·중 양국의 국방장관회의가 그 대표적인 예다. 국방회의는 안보상황에 민감하여 개최되지 않아도 납득이 가능하다. 그러나 경제장관회의의 경우는 부연설명 없이 납득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우리를 더욱 개탄스럽게 만드는 것은 일본에 대한 중국의 태도와 자세다. 3국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면 어떻게 대하는지를 비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은 우리에게는 ‘고질량의 융합 발전을 목표로’ 한중 양국의 잠재력을 발휘해 실무차원에서의 협력을 향상시킬 것을 강조했다. 대신 일본에게는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하면서 공통된 이익을 추구하자고 제시했다.

‘고질량의 융합 발전의 목표’는 최근 중국 국내 경제·산업정책에서 창의적 혁신기술과 금융경제를 융합하여 국가경제발전을 이끄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이 강조한 한·중 양국 간 융합 발전의 의미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중국은 한·중 양국이 연구개발협력을 새로이 심화시키고 이의 상호보완성을 한층 더 구현하고 성과를 공유할 것을 강조했다. 표면적으로는 한·중경제협력의 미래 가치를 강조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중국이 지난 6월 G-20 정상회의에서 주장한 ‘외부 영향’을 받지 말 것을 주문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를 압박하는 발언이다. 즉, 다가올 기술패권문제에서 중국에 경사할 것을 요구하는 대목이다.

중국이 지금 우리와 서구세계를 격리시키려는 노력이 가시화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왜냐면 일본에게는 이런 주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문하는 까닭은 우리나라 대통령의 초지일관적인 발언 하나 때문이다. 중국과의 ‘운명공동체’를 계속 강조한 탓이다. 중국에게는 한국을 끌어당기면 넘어 온다는 식의 관념이 생성될 수 있는 유익한 근거다.

아직까지 서구세계에서 중국과의 운명공동체를 추구하는 나라는 없다. 더욱더 황당한 사실은 중국이 의미하는 운명공동체는 ‘인류운명공동체’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우리 대통령은 계속해서 ‘운명공동체’를 강조한다. 중국의 ‘인류운명공동체’ 개념은 인류와 문명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과 번영, 그리고 협력을 통한 ‘윈-윈’의 신형국제관계를 기반으로 새로운 글로벌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역사적 사명을 공유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운명공동체’를 이런 의미에서 운운하는 것 같지 않다. 예로부터 한·중 양국이 이웃국가로서 운명을 같이 해 온 사실에 방점을 두는 인상을 주고 있다. 즉, ‘너 안에 내가 있고 네 안에 나의 운명공동체가 있다’는 식의 간단한 사고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회담에서도 우리 대통령이 한·중관계를 “잠시 서로 섭섭할 수는 있지만 (한중) 양국의 관계는 결코 멀어질 수 없다”고 설명한 부분에서 이런 사고방식을 감지할 수 있다.

이번 한·중정상회담은 정권 출범 후 7번째 회담이었다. 그러나 지난 6번의 회담과 같이 내실을 기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첫 번째 이후 다섯 차례 회담의 가장 큰 목적이 북한문제와 시진핑의 방한에 모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다. 한·중 양국이 당면한 협력과제는 매우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이제는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양국, 특히 우리의 국익에 보다 더 부합할 수 있는 과제해결에 대중외교의 초점을 맞출 때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