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戰史)를 공부한 이들에게 제2차 포에니전쟁과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극적이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전쟁을 치렀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원전 264~146년 로마와 카르타고는 지중해 패권을 놓고 맞붙었다. 120년 전쟁에서 최종 승자는 로마였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한때 로마를 절멸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다. 명장 한니발은 탁월했다. 그는 보병과 기병, 코끼리를 데리고 알프스를 넘었다. 병력은 절반으로 줄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카르타고 군을 마주한 로마군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패했다.
동로마제국 심장부인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더 드라마틱하다. 유럽 교역로가 필요했던 오스만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로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길이 20㎞, 3중 성벽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금각만 진입은 전세를 바꾼 결정적인 한 수였다. 술탄 메흐메트는 바닷속 쇠사슬을 피해 산으로 배를 이동시켰다. 밤새 산을 넘어온 오스만 선단은 금각만 진입에 성공했다. 결국 허를 찔린 콘스탄티노플은 힘없이 허물어졌다. 두 전쟁에서 묘미는 예상을 뛰어넘는 의외성에 있다. 평범함에서 벗어났기에 승리도, 감동도 있다.
이에 비하면 필리버스터로 정국을 멈춰 세운 자유한국당 수는 얕다. 자유한국당은 본회의에 올라온 전체 안건(199개)을 필리버스터 신청했다. 선거제도 개편과 공수처 설치를 막는다는 명분이다.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본회의 파행에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역풍은 거세다. 20대 국회 내내 자유한국당이 보여준 싸움 방식은 단순하다. 무조건 반대에다 툭하면 장외투쟁이다. 또 국정조사와 특검으로 국회를 멈춰 세우기 일쑤였다. 이번 무더기 필리버스터 또한 그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상했던 대로 국회는 올 스톱이다.
인사청문회는 모욕주기와 신상 털기로 전락한 지 오래다. 남북문제는 아예 보이콧이다. 또 경제가 어렵다면서도 대안은커녕 비판에만 열을 올린다. 국민들은 이런 행태에 물렸다. 이러니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듣는다. 청와대와 여당 실책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 지지율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리당략에 매몰된 때문이다. 야당은 행정부를 견제하고 비판함으로써 국정을 견인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 실패에 최우선 목표를 두고 있는 듯하다. 저주와 증오로는 결코 상대를 이길 수 없다.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는 다수파 독주를 견제하는 수단이다. 소수파에게 주어진 합법적인 의사진행 방해 전술이기도 하다. 국회가 2015년 국회 선진화법을 개정하면서 도입했다. 의제를 벗어난 발언은 금지하고 있다. 지정된 주제를 벗어나면 의장은 제동을 걸 수 있다. 미국 상원은 소설책을 읽어도 문제 삼지 않으니 우리가 훨씬 엄격한 셈이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최장 기록을 갖고 있다. 2016년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에서 12시간 31분 동안 발언했다. 체력도 중요하지만 법안에 대한 이해도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이 같은 취지에 비춰볼 때 무더기 신청은 비판받기에 충분하다. 필리버스터를 법안 상정 자체를 봉쇄하는 수단으로 악용했기 때문이다. 제도 취지대로라면 자신들이 반대하는 선거제 개편, 공수처 법에 집중해야 옳다. 필리버스터 카드로 자유한국당은 20대 국회 마지막까지 국민을 외면했다. 국민들이 보기에 한심하다. 촌극도 벌어졌다. 자신들이 발의한 법안마저도 반대 토론에 부친 것이다. 볼모 잡힌 법안 중 26건은 자유한국당 의원 발의다. 또 상임위 단계에서 합의해준 법안도 76건에 달한다.
결국 전체 199건 가운데 절반 이상(102건, 51.5%)은 자신들이 발의했거나 동의해줬다. 자유한국당 신보라 의원이 발의한 ‘청년기본법’이 대표적이다. 청년기본법은 20대 국회 개원 첫날 한국당이 발의한 1호 법안이다. 얼마 전 황교안 대표가 청년들과의 대화에서 자랑한 법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와 반대 필리버스터를 신청함으로써 스스로 발등을 찍었다. 꼼수에 집착하다 자기가 판 함정에 빠졌다. 그러니 국민들은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108석을 가진 제1야당 소수파인지 황당한 상황이다.
민생 법안도 줄줄이 볼모로 잡혔다. 어린이 교통사고를 막기 위한 ‘민식이 법’을 비롯한 민생 법안들이다. 한국당은 ‘민식이 법’은 필리버스터를 신청하지 않았다며 발뺌하고 있다. ‘포항지진 피해 구제 및 지원 특별법’도 마찬가지다. 포항 지진 이후 2년이 흘렀다. 주민들은 올해도 체육관에서 세 번째 겨울을 나야 한다. 정상적이라면 벌써 지원책을 마련해야 했다. 더구나 포항은 자유한국당 의원 지역구다. 그런데도 민주당에 책임을 돌리고 있으니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지독한 자기 합리화다.
지금과 같은 대응을 바꾸지 않는다면 자유한국당은 희망이 없다. 자유한국당은 박근혜 탄핵으로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그 뒤로도 변화하지 않고 있으니 ‘좀비 정당’이라는 내부 비판마저 제기된다. 관성적인, 빤한 싸움으로는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기득권 지키기에만 연연한다면 결국 사라지는 길뿐이다. 무조건 반대에서 벗어나는 게 살 길이다. 변화하고 혁신해야 한다. 배를 산으로 가져가고, 코끼리가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 그런 변화와 혁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