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中 눈치보랴, 민심 의식하랴...떨고있는 홍콩 재벌들

2019-11-28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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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중 확산에 中·홍콩재벌 밀월 균열

홍콩 자본주의 메스 댈까 '전전긍긍'

美개입도 부담, 특혜지위 상실 우려

홍콩 4대 재벌로 꼽히는 청쿵그룹의 리카싱 전 회장(왼쪽부터)과 헨더슨그룹의 리자오지 전 회장, 뉴월드그룹의 헨리 청 주석, 순훙카이그룹의 궈빙롄 회장. [사진=바이두 캡처]


홍콩 시위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중국 중앙정부와 홍콩 민심의 눈치를 모두 살펴야 할 처지인 홍콩 재계의 곤혹스러움이 커지고 있다.

특히 최근 치러진 구의원 선거에서 반중파가 압승하고 친중파가 궤멸을 당하는 사태를 지켜보며 속내가 더욱 복잡해졌다.
홍콩 내에 만연한 반중 정서를 확인한 중국이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원칙에 메스를 댈 가능성이 높아진 탓이다.

지난 한 세기 넘게 지속돼 온 홍콩식 자본주의가 흔들릴 경우 리카싱(李嘉誠) 전 청쿵그룹 회장 등으로 대표되는 홍콩 재계는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미국이 홍콩 사태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상황도 부담스럽다. 미·중 간 적절한 긴장 관계는 홍콩이 금융 및 중개 무역 허브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홍콩이 그동안의 특별 지위를 모두 잃을 수도 있는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홍콩 인권법)' 제정까지 추진되는 것은 재계 입장에서 달갑지 않다.

중국 당국의 경고에도 홍콩 재벌들의 탈(脫)홍콩 행보가 여전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흔들리는 일국양제, 긴장하는 홍콩 재벌

중국과 영국이 홍콩 반환 협상을 시작한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은 일국양제 원칙을 처음으로 천명했다.

이듬해인 1983년 중국은 '홍콩 문제 해결을 위한 12개 조항'을 발표했다. 특별행정구 설치, 고도의 자치권 부여, 현행 법률 및 경제·사회제도 유지, 사유재산 인정 등이 골자다.

이후 중국 중앙정부와 홍콩 재벌 간의 밀월 관계가 시작됐다.

홍콩 최대 부호인 리카싱 전 청쿵그룹 회장은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혁·개방 프로젝트에 편승해 중국 본토 내 사업을 확장해 갔다.

상하이 컨테이너 터미널, 광저우∼주하이 고속도로, 선전 매립지 개발 사업 등 주요 인프라 사업에 모두 참여하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미국 등 서방 세계가 중국에 대한 경제 제재에 나서자 홍콩 재계는 막대한 자금을 본토에 투자하며 위기 극복에 기여했다.

덩샤오핑의 후임인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장쩌민의 뒤를 이은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 때까지도 수위의 차이는 있으나 '밀월'이라고 부를 만한 관계가 이어졌다.

홍콩이 중국에 공식 반환된 1997년 홍콩을 방문한 장쩌민은 청쿵그룹 계열의 최고급 호텔 하버플라자를 숙소로 택했다.

후진타오는 리카싱 전 회장과의 독대를 허용하는 특혜를 베풀기도 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집권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급격한 경제 발전에 힘입어 몸집을 불린 중국 토종 기업들이 홍콩 진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2016년 이후 중국 최대 이동통신사인 차이나모바일의 홍콩 가입자 수는 50% 이상 증가했다. 홍콩 4대 통신사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다.

중국의 대형 부동산 개발업체인 바오리(保利)그룹은 2013년 홍콩 부동산 거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 안팎이었지만 지난해 11%까지 높아졌다.

바오리 등 중국 부동산 개발업체들은 올 상반기 홍콩 행정부가 매각한 주택용지의 60%를 사들였다.

홍콩 행정부가 중국계 은행으로부터 받은 대출 규모는 1750억 달러(약 205조6200억원)로 지난 10년 동안 2배 이상 증가했다.

통신·부동산·금융은 기존 홍콩 재벌들의 주력 사업 분야였다.

홍콩 재계의 피해 의식이 확산하던 중 터진 이번 시위 사태는 중국 중앙정부와의 관계가 더욱 냉랭해지는 계기가 됐다.

홍콩 내 반중 시위가 격화되자 중국은 홍콩 재계를 총알받이로 내세웠다. 홍콩의 살인적인 부동산 가격과 경제적 불평등 등의 문제를 재벌의 책임으로 떠넘긴 것이다.

실제 중국 공산당 중앙정법위원회(정법위)는 지난 9월 초 "(홍콩의 부동산 재벌들이) 땅을 매집하고 돈을 움켜쥐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당 기관지 인민일보도 "정부가 강제 인수를 통해 홍콩 부동산 재벌의 토지를 빼앗아야 한다"고 거들었다.

홍콩 입법회(의회)의 친중파 정당인 민주건항협진연맹(민건련)이 자발적 토지 기부를 촉구하자 홍콩 4대 재벌 중 한 곳인 뉴월드 그룹은 울며 겨자 먹기로 보유 토지의 18%에 해당하는 28만㎡를 정부와 사회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4대 재벌의 또 다른 축인 헨더슨(恒基兆業), 순훙카이(新鴻基) 등도 홍콩 행정부의 토지 수용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리카싱 전 회장은 시위 사태 장기화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 지원을 위해 10억 홍콩달러(약 1500억원)를 기부했다.

그럼에도 홍콩 재계는 여전히 긴장한다. 그동안 부를 축적하는 원천이었던 홍콩의 자본주의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지난 24일 실시된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반중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중국 중앙정부를 당혹하게 했다.

홍콩 내 반중 정서가 얼마나 심각한지 확인한 중국으로서는 기존 일국양제 체제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가할 공산이 크다. 권위적인 방식의 대응을 선택한다면 홍콩 자본주의의 쇠퇴와 중국 기업의 추가적인 파상 공세가 이뤄질 수 있다.

덩샤오핑이 50년 동안 유지하겠다고 공언한 일국양제 원칙에 조기 균열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는 형국이다.

◆미·중 갈등도 변수··· 홍콩 탈출 이어질 듯

그럼에도 홍콩 재계는 중국 중앙정부를 향한 충성 경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구의원 선거 이틀 전인 지난 22일 홍콩의 20개 대기업과 주요 상공회의소 5곳은 폭력 시위 종식을 호소하는 신문 광고를 냈다.

청쿵·뉴월드·헨더슨·순훙카이 그룹 등 홍콩 4대 재벌이 앞장섰다.

이번 시위로 홍콩에 대한 중국 중앙정부의 입김이 약화되거나, 시위대가 요구하는 행정장관 직선제 등이 실현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홍콩 정국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마당에 미국이 홍콩 사태에 대한 개입을 노골화하고 있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최근 미국 상원은 홍콩 인권법을 사실상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이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만 하면 즉시 발효된다.

홍콩 인권법은 매년 홍콩의 자치 수준을 평가해 기존 무역·부문 혜택을 유지할지 결정하는 게 핵심이다. 미국의 기준에 미달하면 홍콩이 누려 온 특별 지위가 박탈돼 중국 본토와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

금융 허브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중개 무역을 통해 벌어들이던 수익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난해 미국과 홍콩 간의 통상 규모는 673억 달러(약 79조1400억원)에 달했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중국이 시장을 더 개방하고 중국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하는 것은 홍콩 재계 입장에서 나쁘지 않은 환경이다.

다만 주요 2개국(G2) 간 패권 경쟁의 불똥이 홍콩으로까지 튀는 건 위험하다.

한 베이징 소식통은 "홍콩은 중국과 외부 세계를 잇는 통로이자 창구로 막대한 이득을 봤다"며 "중국의 체제와 제도를 홍콩에 이식하려는 시도도, 미국이 중국과 홍콩을 도매금으로 보는 시선도 홍콩 재계 입장에서는 두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홍콩 재벌들이 자산과 사업을 해외로 옮기는 건 향후 닥칠 다양한 측면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행보다.

청쿵그룹은 본사를 조세피난처 케이맨제도로 이전했고, 유럽과 오세아니아 지역에 대한 투자도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중이다. 그 결과 청쿵그룹 매출 가운데 홍콩과 중국 본토 비중은 각각 10%와 9% 수준으로 낮아졌다.

초대 홍콩 행정장관을 지낸 둥젠화(董建華) 일가까지 보유 자산을 중국 국영 해운사에 넘기고 손을 뗐을 정도다.

홍콩 시위 사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예단하기 어려운 만큼 홍콩 재벌들의 홍콩 탈출기도 언제까지 이어질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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