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가 지난 1일(현지시간) 공식 취임했다. 프랑스 출신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지낸 라가르드는 ECB 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장이다. 변호사 출신이지만, 프랑스 재무장관과 IMF 총재로서 이미 경제, 재정 분야의 능력을 인정받은 그지만,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경제 흐름이 워낙 좋지 않아 ECB를 이끄는 게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라가르드의 취임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유로존의 경제성장 둔화세가 뚜렷한데, ECB 내에선 마이너스 금리에 대한 회의론까지 부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로존 '침체' 조짐…3분기 성장률 0.2% '성장정체'
더 큰 문제는 유로존의 성장둔화가 장기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미·중 무역전쟁의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지역 중 하나로 유로존을 꼽는다. 무역전쟁으로 관세가 뛰면서 기업 투자와 제조업 등 주요 경제지표의 위축세가 뚜렷하다.
유럽 최대 화학회사인 바프스의 마틴 브루더뮐러 회장은 최근 “미·중 무역 갈등이 사업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바스프는 화학부문 실적악화로 올해 큰 부침을 겪고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둘러싼 불확실성도 유로존 경기침체에 전망에 힘을 보태고 있다. WSJ는 “영국 의회가 브렉시트 합의안에 대한 승인 투표를 보류하면서 일정이 연기됐는데, 12월 조기 총선까지 치르기로 해 브렉시트의 향방이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영국은 보리스 존슨 총리의 조기 총선안이 하원을 통과하면서 오는 12월12일 조기 총선을 실시할 예정이다.
유로존 경기침체 전망은 라가르드에게 큰 도전이다. ECB총재는 유로존 금리를 결정하고 유로화 공급을 통제하는 등 역내 금융통화시스템을 총괄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마이너스 금리 정책은 그동안 ECB의 주요 통화부양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ECB는 지난 9월 기준금리의 일종인 예금금리를 -0.4%에서 -0.5%로 낮췄다.
ECB의 예금금리는 시중은행이 ECB에 보통 하루짜리 단기자금을 예치하고 받는 금리다. 이를 마이너스로 낮추면 은행들은 ECB에 자금을 맡기면서 비용 부담을 떠안게 된다. 예치 수요가 주는 만큼 시중 유동성이 늘어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시장에서는 라가르드 총재가 전임자인 마리오 드라기와 마찬가지로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이어할 것으로 본다. 라가르드 역시 드라기의 후임으로 지명된 뒤 여러 차례 공식석상에서 기존 통화정책 기조를 고수하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그러나 최근 유로존 주요 국가들 사이에서 마이너스 금리에 대한 회의론이 팽배하다. 마이너스 금리를 비롯한 ECB의 통화부양정책이 개별 국가들의 경기침체를 막지는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독일과 네덜란드 중앙은행은 ECB의 통화완화 기조가 실물경기를 살려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산 버블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벨기에 중앙은행도 최근 ECB가 마이너스 금리 제도를 종료하길 바란다는 의견을 내놨다. 드라기 전 총재의 행보를 지지했던 이탈리아 중앙은행 정책자들도 기존 정책이 더 이상 경기 부양 효과를 낼 수 없을 것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전문가들은 라가르드가 특유의 리더십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길 기대하는 분위기다. 라가르드는 IMF 총재 시절에도 리더십 역량을 십분 발휘해 중재자로서 충분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특히 유럽 재정위기 때 ECB의 적극적인 통화부양 노력과 독일 등의 재정긴축 요구 등을 조율하는 데 앞장섰다. 올리 렌 핀란드 중앙은행 총재는 "라가르드는 소통하고 팀을 구성하는 데 능숙하다"며 "그가 이 장점들을 잘 활용하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면 경제학자 출신도 아니고, 중앙은행 경험도 없는 라가르드가 가야 할 신임 ECB 총재의 길이 매우 험난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