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정신’은 사라지고 ‘육사신’이 설치는,
‘미스터 선샤인’보다 훨씬 재미난 소설
1. 작년 이맘때 읽었던 <운미회상록>을 다시 빌려왔다. TV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대인기를 끌던 때다. 창작 경력이나 나이로나 원로작가라고 불러 마땅할 김원우씨(72)의 2017년 작 <운미회상록> 역시 <미스터 선샤인>처럼 구한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이다.
2016년에 낸 소설 창작론 <작가를 위하여>에서 소설의 주요 기능 하나로 ‘정보 제공’을 꼽은 김씨는 이 책에서 많은 정보·지식을 펼쳐 자신의 말을 지킨다. 페이지마다 ‘먹물을 좀 먹은 편인’ 나에게도 사전을 찾아야만 뜻을 알 수 있는 새로운 어휘-우리말과 한자어를 망라한-가 즐비하며, 수묵난초로 이름난 운미의 문방사우-붓, 먹, 벼루, 종이-와, 좋은 서화와 나쁜 서화에 대한 지독히 상세한 설명이 김씨가 바람직한 소설 문체로 꼽는 만연체 문장 안에 ‘과갈(瓜葛, 오이와 칡 줄기)’처럼 휘감겨 늘어져 있다.
2. 일년 만에 이 책을 또 빌린 것은 계정(桂庭) 민영환(閔泳渙, 1861~1905), 약산(約山) 김병덕(金炳德, 1825~1892), 도원(道園) 김홍집(金弘集, 1842~1896)에 대한 운미의 회상(작가의 평가)을 한 번 더 읽기 위해서였다. 세 사람의 인품을 그린 문장들은 그 자체가 향기롭고 고아(高雅)하다.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요즘에는 왜 이분들처럼 강단 있고, 자애롭되 일처리는 엄정하며,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없는가를 또 생각했다. 일구이언, 표리부동, 언행불일치의 인물이 설치는 세상이 되었나를 생각했다. 일년 전에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계정은 운미의 동생뻘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하고 창피함을 못 견뎌 자결했다. 운미는 계정이 자결한 소식을 듣고 슬픔으로 그를 회상하는데, 이런 내용이다. “신하는 상감(고종)의 명이 떨어지기를 매양 기다려야 하는 일개 졸장부에 지나지 않지만, 때로는 영을 어서 내립시라고 재촉할 용기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그러지 못하는 용신(庸臣, 어리석은 신하)일 뿐”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계정은 즉각 “내가 하겠습니다. 간단합니다. 그게 뭣이 어렵습니까. 앞뒤 따지지 말고 성큼 나서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달리 통촉하셔야 옳습니다, 이렇게 분질러 아뢰고 나면 그뿐이고 그다음은 말이 말을 몰아가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답한다.
“최고 권력자의 말이 그르면 끊고 들어가면 된다, 한번 끊어지고 분질러진 말은 최고 권력자도 다시 잇지 못한다, 내가 그의 말을 끊어보겠다, 말리지 마라.” 지금 청와대와 광화문과 세종시 일대의 관가에서, 또 여의도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계정이 보여준 강직한 인품은 천연기념물처럼 희귀하다. 오래전에 멸종됐을지 모른다.
약산(約山)은 운미의 은문(恩門, 과거 시험의 시험관. 급제자는 그를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이었다. 운미에 따르면 약산은 “이목구비도 반듯하고 거동도 단정해서 그이 앞에서는 누구라도 나이와 상관없이 저절로 조신스러워진다. 엄정한 기색에 학덕이 넘실거리는 데다 서늘하고 착한 눈매 때문에 임금조차도 그를 나무랄 수 없는 사람”이다. ‘은문’에 대한 운미 최고의 상찬(賞讚)은 “그의 몸가짐은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우리’ 가문과 ‘내’가 어떻게 이바지하고 있느냐를 늘 챙긴다는 증거다. 나만이 이 귀찮은 국사를 감당할 수 있다는 자부심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평가다.
운미는 약산이 은문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자부심을 존경했기에 평생 스승으로 모셨을 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약산의 자부심을 반의반이라도 갖고 일하는 공직자도 청와대, 광화문, 세종시와 여의도에서 보기 힘들다. 대신 죽은 후 묘비에 ‘장관’ 혹은 ‘차관’, 그것도 아니면 ‘이사관’, ‘서기관’ 같은 생전의 벼슬만 새겨줘도 좋겠다는 자들만 득시글한 것 같다.
도원은 친일파로 몰려 민중에게 맞아 죽었다. 총리대신으로 있을 때다. 운미는 “그이는 어떤 일을 맡겨도 달다 쓰다 말도 없이 온힘을 다 쏟아 붓는다. (제물포조약 같은) 그런 국사야 죽도록 고생해봤자 욕만 먹을 궂은 일인데도 그는 아래위 사람의 손과 어깨를 어루만지며 성사시켰다. …. 그는 누구에게라도 공무에 임할 때처럼 방정하고, 말씨에도 그 개결(介潔)한 성품이 배어 있다”고 도원을 회상한다.
도원은 눈앞에 서 있던 일본군에게 몸을 맡기면 살 수 있었으나 차라리 우리 백성에게 맞아 죽겠다며 피하지 않았다. 일하기 싫어하는 부하, 왜 하필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나 의심하는 부하들을 달래고 어루만져 끌고 나가되, 책임은 내가 진다는 도원의 인품을 지닌 인물을 복지부동, 책임회피, 좌고우면, 면종복배가 만연한 지금 공직사회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런 훌륭한 분들이 있었는데도 대한제국은 망했다. 이런 분들은 없고, 정반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정치권 언저리와 관가 부근, 학교와 언론계에도 넘치고 넘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로 나라와 사회가 혼란, 혼탁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3. 신하는 충신과 간신 두 종류만 있는 걸로 알았던 나는 <운미회상록>을 읽고, 사전을 뒤진 끝에 충신은 ‘육정신(六正臣)’의 하나이며, 간신은 ‘육사신(六邪臣)’의 하나임을 깨우쳤다.
사전에 나온 대로 소개하면, 육정신은 성신(聖臣, 인격이 훌륭한 신하) 양신(良臣, 어진 신하) 충신(忠臣, 나라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신하) 지신(智臣, 지혜로운 신하) 정신(貞臣, 법을 받드는, 지조가 곧고 바른 신하) 직신(直臣, 강직한 신하)이며, 육사신은 구신(具臣, 있으나 마나 숫자만 채우는 신하) 유신(諛臣, 아부가 장기인 신하) 간신(奸臣, 간사한 신하) 참신(讒臣, 모함이 전문인 신하) 적신(賊臣, 반역하거나 불충한 신하) 망국신(亡國臣, 나라를 망하게 하는 신하)이다. 육사신은 어리석고 아둔한 왕인 암군(暗君) 혹은 혼군(昏君)의 권우(眷遇,임금의 특별한 대우) 속에서 권세를 누리다가 결국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
육정신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순신(純臣, 마음이 곧고 진실한 신하)과 진신(盡臣, 정성을 다하는 신하)도 바른 신하들이며, 활신(猾臣, 교활한 신하)과 우신(愚臣, 자기 생각 없이 남의 말만 따라하는 어리석은 신하), 요신(妖臣, 요사스러운 행동을 하는 신하) 역시 나라에 해로운 신하로 꼽힌다. (작년 이맘때, 사실(史實)과 동떨어진 가짜역사에 속기 싫어 그 재미나다는 '미스터 선샤인'을 외면하고, 사전을 펴놓고 만연체 문장의 시작과 끝을 손가락 짚어가며 찾아 읽은 <운미회상록>의 그 재미를 나 말고 몇 사람이 알랴.)
5. 김씨는 지난해 7월 장편소설 <이 세상 만세>를 출간했다. 다섯 편의 단편을 모은 형식이나 다 읽고 나면 같은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당시 신문 서평은 <이 세상 만세>를 소개하면서 “2016년의 촛불은 집단지성의 표출이 아니라 집단심성의 표출이었다”라는 작가의 말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글 읽는 분 가운데 요절한 가수 배호의 노래를 좋아하는 분이 계신지? 그런 분이라면 반드시 이 책 제5장 ‘고목의 나이테’를 읽어야 한다. 배호 노래는 뭐든 좋아하고 흥이 나면 음치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따라 부르는 나는 배호에 관한 글이라면 꽤 읽어왔다. 그런 만큼 배호의 일대기를 읊을 수 있으며 그의 노래 목록도 길게 늘어놓을 수 있다. 하지만 ‘고목의 나이테’만큼 배호 노래를 심금이 울리도록 설명한 글은 못 봤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의 배호 팬 여러분, 이거 하나는 꼭 읽어보세요. 본전 뽑고도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