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본과 관련 몇 가지 인연이 스쳐갔다. 덕분에 차분하게 일본과 일본 국민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 됐다. 방학을 이용해 일시 귀국한 육사 생도가 첫 번째다. 그는 2, 3학년 과정을 일본 방위대에서 보내고 있다. 내년 초 육사 4학년으로 복귀한다. 화제는 단연 한·일 갈등이었다. 이런저런 대화 끝에 일본 생도들과의 관계를 물었다. 양국 갈등 때문에 불편하지 않으냐고 떠봤다.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 동료들은 빠른 시일 내 관계가 회복되었으면 한다. '일본과 한국은 친구다'는 말을 전해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정부는 가파른 정치 언어를 주고받았지만, 그들은 그저 청춘이구나 싶었다. 결국 정치 셈법은 복잡해도 신세대는 불편한 현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일대사관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전직 외교관 서상목 대표도 만났다. 그가 운영하는 우동가게 ‘기리야마본진’에서다. ‘기리야마본진’ 또한 불매운동을 피해가진 못했다. 그는 지금도 틈틈이 일본 관련 기고와 저술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들려주는 일본 이야기는 깊이 있고 생생하다. 현장에서 익힌 살아 있는 경험이 원천이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라는 책을 통해 진정한 극일(克日)을 제시한다. 조선은 선(善), 일본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역사관을 경계한다. 일본을 이기려면 근원을 따져보라고 한다. 일본 굴기를 메이지 유신부터 계산하는 것은 반쪽짜리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간과한 에도시대 260년에 주목했다. 그때 축적된 역량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분출됐을 뿐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니 긴 호흡에서 치밀하고 정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맹렬했던 불볕더위도 어느덧 한풀 꺾였다. 긴장감으로 고조됐던 현해탄에도 이성이 찾아들었다. 시간을 이기는 것은 없다는 진리를 새삼 절감한다. 8·15 광복절 경축사가 분기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기꺼이 손잡겠다”고 했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도 내비쳤다. 강경하고 자극적인 비판은 피했다. 대신 절제된 대일 메시지를 보냈다. 대결과 반목보다 대화와 협력을 강조한 것이다. 악화일로에 있는 한·일 갈등을 성숙한 자세로 풀어나가자는 의지다. 이제 공은 아베 정부에게 넘어갔다. 단호하되 대화에 필요한 문은 열어둘 필요가 있다. 나아가 아베 정권과 일본 국민은 분리해 대응해야 한다. 감정적인 민족주의는 분풀이에 그칠 뿐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되풀이된다. 서애 유성룡은 참혹한 임진왜란을 겪고 ‘징비록’을 썼다. 같은 재앙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치욕스런 기록이라며 금서로 낙인찍고 봉인했다. 반면 일본과 중국에서 ‘징비록’은 베스트셀러였다. 임진왜란 7년 동안 국토는 황폐화됐고 민심은 무너졌다. 무엇이 부끄러워 감췄는지 황당하다.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연암은 1780년 건륭제 70세 생일을 축하는 사절단으로 북경을 다녀와 견문록을 썼다. 그는 중원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세력으로서 청나라를 인정했다. 그리고 더 이상 ‘되놈’이 아닌 본받아야 할 나라로 평가했다. 그러나 사대주의에 매몰된 당시 사대부들에게 ‘열하일기’는 불온서적이었다. 그들에겐 중원에서 세력교체는 안중에도 없었다. 망한 지 130년 지났어도 명나라 찬가만 불러댔다. 실록에 따르면 병자호란(1636~1637) 당시 16만여명이 끌려갔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치욕스런 삼두고배 의식을 올려야 했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 국민 모두가 바라는 꿈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냉철한 현실 인식과 치밀한 전략 수립이 전제돼야 한다. 과잉 민족주의에만 기댄다면 결과는 불문가지다. 무는 개는 짖지 않는다. 일본을 향해 요란한 선동과 구호는 멈춰야 한다. 대신 무겁게 침묵하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이번 사태를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따라 제대로 된 극일이 가능하다. 치욕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거든 역사에서, 국민에게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