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안성기(67)를 빼고 한국 영화 100년의 역사를 논하기는 어려울 거다. 영화 '하녀'(1960)를 비롯해 얄개전'(1965),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만다라'(1981), '적도의 꽃'(1983), '겨울 나그네'(1986), '투캅스'(1993),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실미도'(2003), '라디오스타'(2006), '부러진 화살'(2011) 등등 오랜 시간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해왔으니까.
연기 경력 62년 차 한국 영화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증인인 안성기가 이렇게까지 '롱 런'할 수 있었던 건,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열정 덕. "더 오래 연기하고 싶다"는 그는 젊은 세대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가고자 또 한 번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사자'도 결국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드라마가 있는 셈이죠. 그런데 스타일이 확고하고 드라마보다 장르에 더 충실하니까 저로서는 '다른 영화'를 해 본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스펙트럼이) 넓어졌다고 볼 수 있겠죠."
안성기의 스펙트럼을 확장시킨 '사자'는 오컬트와 판타지 그리고 액션을 결합한 영화. 그간 많은 작품에서 묵직하고 진중한 인물을 연기해 온 안성기는 악을 쫓는 구마사제 안신부 역을 통해 다양한 연기 결을 선보였다.
"처음 안신부 역을 제안받고 기분이 참 좋았어요. 돌고 돌아 제가 들어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저를 염두에 뒀다고 하니···. 하하하. (안신부는) 진지하면서 동시에 부드럽고 따듯함이 깃든 인물인 것 같아요. 다양한 결을 느낄 수 있었죠. 한 '선'만 가지는 캐릭터도 많은데 안신부는 다양한 면을 표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죠."
안신부는 바티칸에서 온 구마 사제다. 구마 사제단 '아르마 루치스(빛의 무기)' 소속 사제로 한국에 숨어든 강력한 악을 찾고 있다. 강한 신념과 선을 가진 그는 모든 걸 걸고 임무에 나서는 캐릭터. 구마를 도와주던 최신부(최우식 분)가 떠난 뒤 용후를 만나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저는 안신부를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해석했어요. 용후 덕에 성공했지 사실 가만히 보면 구마할 때 계속 실패만 하잖아요. 그의 등에 있는 상처를 보면 안신부의 험난한 과정을 엿 볼 수 있죠. 스승도 구마를 하다가 죽었고, 용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도 죽음을 맞았을지 몰라요. 너무나 약한 사람이고 신에게 의지하며 일을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스갯소리로 말했으나 안성기는 최근 젊은 세대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놀라, 더 활발하게 영화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며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자'는 젊고 트렌디한, 그야말로 '변신'에 적격인 작품이었다.
그런만큼 기존 영화와 '사자', 즉 장르 영화에 있어 연기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연기 경력 62년 차 배우에게 '변화'와 '변신'의 계기가 된 작품이니 연기적으로도 달라진 면이 있을까 호기심이 생긴 터였다.
"조금 더 '재미나게'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됐다고 할까요. 예전 작품이었다면 안신부의 심리 상태를 조금 더 딥하게 표현하려고 했겠죠. 더 드러나도록 말이에요. 하지만 안신부 캐릭터에 너무 집중할 수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두루두루 어울릴 수 있게끔 무게를 분산시키는 방법을 터득했죠."
연기 경력 61년 만에 새로운 경험도 즐겼다. 라틴어 대사를 줄줄 읊으며 과감한 액션까지 뛰어드는 등 기존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안성기의 색다른 면면을 과감하게 드러낸 것이다.
"라틴어 대사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시간만 나면 중얼중얼했죠. 양이 은근히 되더라고요. 부마자 몸에 들어간 마귀와 싸운다고 생각을 했고 그 장면에서 라틴어 대사를 줄줄 읊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넣어야 해서 어려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덕에 '차별화'가 생긴 거 같더라고요. 안 신부 자체도 진지하고 힘 있는 캐릭터가 된 거 같아요."
안성기는 대사 중간에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읊어야 한다며 "연기 생활 61년 중 이렇게 대사를 열심히, 많이 외운 건 처음"이라고 한탄 반, 감탄 반 섞어 말하기도 했다.
또 액션에 관해서는 아쉬움이 많다고. "맞고만 있는 안신부를 연기하다"가 이대로 맞고 있을 수만은 없어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캐릭터 성격상 의견이 반영되지는 않았다는 슬픈(?) 결말이다.
"무술 감독이 '안신부는 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더라고요. 어떻게 한 번쯤은 맞서 싸워볼 만도 한데 항상 당하기만 하고. 그거 참느라 힘들었습니다. 하하하. 너무 아쉽더군요.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이렇게 열심히 당해줘야 구해주는 맛도 있으니까요."
"후배들과의 호흡은 언제나 신선한 자극을 줘요. 아무래도 힘들이 강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배우는 게 많아요. 연기 외적으로 대화 중에도 새로운 점을 많이 느끼기도 하고요."
안성기는 실제로 박서준과 또래인 아들이 있다며 "만나자마자 편하게 대해줬으면 해서 '선배'라 불러 달라고 했다"는 일화를 밝히기도 했다.
"현장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즐거운 마음이 들어야 또 (현장을) 가고 싶고, 연기하고 싶은 거 아니겠어요. 후배들이 즐거운 마음이 들 수 있도록 편안하게 해주려고 노력한 거 같아요."
앞서 언급한 대로 62년 차 배우 안성기는 '사자'를 통해 연기적으로 변신하고자 한다. "왜 계속해서 도전하고, 변신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연기를 계속하고 싶기 때문"이라며 침착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어느덧 제 연기 경력이 62년쯤 됐어요.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본보기'로 삼을 만한 분이 없더라고요. 따라가야 할 사람은 활동을 접었거나 돌아가셨어요. 그나마도 해외에 있는 로버트 드니로 정도 꼽을 수 있겠네요. 저보다 10살가량 많은데 아직 좋은 영화에 출연 중이잖아요. 저도 열심히 하면 이 배우처럼 좋은 작품을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죠. 배우로서 매력을 가지고 다음에는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 항상 고민해요. 저는 영화를 너무 좋아하고 오래오래 찍고 싶거든요. 그런데 그 좋아하는 일을 저만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같이 하는 이도, 보는 이도 좋아야 하는 거니까요. 계속 배우고, 노력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