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홍콩 재벌은 최근 로이터통신에 "홍콩 씨티은행 계좌에 있던 1억 달러(약 1180억원) 넘는 돈을 최근 싱가포르로 이전했다"고 귀띔했다. 익명을 요구한 그는 "나는 시작일 뿐"이라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콩에서 출구를 찾는 건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홍콩 부동산 투자업체 포트우드캐피털의 피터 처차우스 이사는 CNBC에 "아시아 사업 거점을 홍콩에서 다른 지역으로, 특히 싱가포르로 이전하는 안을 검토하는 기업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돈 옮길 수 있나요'...홍콩 정세 불안감 고조
홍콩과 싱가포르는 오랫동안 아시아 대표 금융허브 자리를 두고 경쟁을 펼쳐왔다. 두 도시 모두 자본시장 친화적인 금융시스템과 독립적인 사법시스템을 바탕으로 안전하고 투명한 금융 중심지를 자처하며 국제 자본과 기업을 빨아들였다. 세계 주요 도시의 금융 경쟁력을 평가하는 영국 지옌그룹의 국제금융센터지수(GFCI)에서 지난해 홍콩과 싱가포르는 뉴욕과 런던의 뒤를 이어 나란히 3, 4위를 차지했다.
홍콩은 특히 중국 본토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의 효과를 톡톡히 누려왔다. 거대시장인 중국 본토를 향하려는 다국적 기업들이 홍콩을 관문으로 삼았고, 중국 부자들은 자산 도피처로 홍콩을 택했다.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홍콩에서 1억 달러 이상을 보유한 자산가는 853명으로, 싱가포르의 2배가 넘는다.
그러나 최근 홍콩 정부의 범죄인 송환법 개정 시도는 홍콩이 더 이상 독립적인 사법시스템을 유지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불을 지폈다. 송환법 개정 이후 중국 본토로 범죄인 인도가 가능해지면 '한 나라 두 체제(일국양제)'가 사실상 무너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홍콩 시민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송환법 개정안은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중국 영향력에 대한 불안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중국 정부가 홍콩 시위에 직접 개입해 본토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추측도 나온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본토에서 홍콩 시위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면서 중국 당국이 홍콩 시위를 진압할 명분을 쌓고 있을지 모른다고 짚었다. 홍콩 기본법 18조에 따르면 중국은 홍콩이 국가 단합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결정을 통해 홍콩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본토법 적용을 명령할 수 있다.
사정이 이렇자 고액 자산가를 전담으로 관리하는 홍콩 현지 프라이빗뱅커(PB)들에겐 자산을 해외로 이전할 수 있냐는 고객들의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시위 전과 비교해 4배나 늘었다. 자산이 1억 달러 이상인 초부유층뿐 아니라 1000만~2000만 달러 수준의 자산을 가진 고객들의 문의도 많다고 한다. 홍콩 소재 중룬로펌의 클리포드 응 파트너는 일국양제가 끝나는 2047년을 미리 대비하려는 고객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입김 피해 싱가포르로 쏠리는 홍콩 머니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곳은 싱가포르다. 블룸버그통신은 홍콩 시위가 "싱가포르, 런던, 뉴욕 등 중국의 손이 닿지 않는 지역으로 홍콩의 자금을 이동시키는 방아쇠가 됐다"며 "싱가포르의 2조4000억 달러 규모의 자산관리 산업이 정치적 안정성, 언어, 신속한 항공 연결 등의 이점을 갖고 있어 최대 수혜국으로 부상했다"고 지적했다.
싱가포르는 현대적이고 안정적인 금융시스템과 정치적 안정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강력한 사법시스템 아래 정치적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기 때문에 홍콩에서처럼 대규모 시위는 꿈도 꾸기 어렵다. 중국어와 영어가 통하고 비교적 접근성이 좋다는 것도 중화 자본에 매력적인 부분이다.
홍콩 소재 다국적 은행에서 PB부문을 이끄는 한 관계자는 홍콩 부호들이 뭉칫돈을 싱가포르로 옮기고 있다고 로이터에 귀띔했다. 홍콩의 유명 변호사인 케빈 얌은 때를 기다렸다가 싱가포르로 자산을 옮길 준비를 하는 복수의 홍콩 고액 자산가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에서 점점 늘어나고 있는 패밀리오피스도 사업 기지로 홍콩보다 싱가포르를 선호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패밀리오피스란 초부유층이 자기 자산 관리를 위해 세우는 자산운용회사를 말한다. 말레이시아 신탁회사 포트컬리스그룹의 데이비드 총 회장은 2억 달러 이상을 운용하는 한 패밀리오피스가 홍콩과 싱가포르를 견주다가 싱가포르로 마음이 기울어진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홍콩의 정치적 상황이 더 악화할 때를 대비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됐다. 위험에 대비해 싱가포르에서 미국 달러 표시 보험 상품에 가입하려는 홍콩인도 부쩍 늘었다. 보험회사 싱가포르라이프는 유산 상속을 포함해 맞춤형 보험 설계를 원하는 홍콩 고객이 최근 20~30% 정도 증가했다고 밝혔다.
안 그래도 DBS나 OCBC를 포함한 굴지의 싱가포르 은행들은 진작 홍콩과 중국에 진출해 범중국 매출 비중을 늘려왔다. 글로벌 자산관리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싱가포르 자산관리회사들도 싱가포르에 중국, 홍콩, 대만 고객을 위한 범중국 데스크를 운영해 은행 계좌 개설이나 패밀리오피스 및 신탁 설립을 지원하고 있다.
싱가포르 최대 금융회사인 DBS그룹홀딩스 PB 부문의 로렌스 루아는 "지난 몇 주 동안 홍콩 상황에 관한 문의가 늘었다"며 "투자자, 사업가, 자산가는 질서와 법치를 원한다. 홍콩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도피처를 찾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싱가포르 금융당국은 표정 관리에 힘쓰는 눈치다. 홍콩의 불행을 틈타 이익을 받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싱가포르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은 현지 자산운용사에 홍콩 시위를 이용해 홍콩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과도한 마케팅을 삼갈 것을 당부했다. 싱가포르 은행 관계자는 "홍콩에서 진행되는 상황에서 과도한 이익을 취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고 설명했다.
◆다국적 기업도 홍콩 탈출 행렬 동참하나
홍콩을 아시아 거점으로 삼은 다국적 기업들이 홍콩을 이탈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콩의 사업 환경이 당국이 기업 경영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중국 본토식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서다. 타라 조셉 홍콩 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은 최근 CNBC 인터뷰에서 “최근 몇몇 기업들이 아시아 본부를 싱가포르로 옮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개발업체 골딘파이낸셜홀딩스는 지난달 홍콩의 사회적 동요와 경제적 불안정을 이유로 14억 달러 규모의 부지 입찰 계획을 취소하기도 했다. 컨설팅업체 프로펫에서 아시아 사업을 이끄는 제이 밀리켄 선임 파트너는 "기업이 홍콩 정세를 우려해 투자를 미루는 건 합리적인 결정"이라며 "홍콩의 불안정이 걱정이라면 싱가포르 같은 도시를 아시아 거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올해 홍콩과 싱가포르의 기업공개(IPO) 시장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올해 상반기 싱가포르 증시에서는 9개 기업이 새로 상장해 15억5000만 싱가포르달러(약 1조2400억원)를 조달했다. 규모 면에서 지난해 동기 대비 182% 급증한 것이라고 딜로이트는 집계했다. 중국 최대 액화석유가스(LPG) 수입업체 오리엔탈에너지는 무역과 물류를 담당하는 자회사 싱가포르동화에너지의 IPO를 계획하면서 자본조달처로 홍콩과 뉴욕을 모두 고려했으나 싱가포르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블룸버그가 전했다.
홍콩의 경우 상반기 총 IPO 공모액이 695억 홍콩달러(약 10조5000억원)로 규모 면에서 싱가포르를 압도했지만, 한 해 전과 비교해서는 27%나 감소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전했다. 상장을 연기하거나 취소하는 기업이 줄을 잇고 있다. 지난달 홍콩 최대 재벌이 이끄는 CK허치슨 그룹 산하 제약업체 허치슨차이나메디테크가 상장 계획을 연기했고, 중국 핑안보험 산하 핀테크 기업 원커넥트는 아예 홍콩에서 뉴욕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장 최근에는 올해 세계 최대 규모의 IPO가 될 것으로 주목받던 AB인베브 아시아법인 ‘버드와이저 컴퍼니 APAC’가 홍콩 상장 계획을 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