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정치 불신 부르는 막말 중독

2019-06-0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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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병식 객원 논설위원]




국회의장실과 대변인실에 있을 때 기자 후배들을 자주 접했다. 식사 자리를 빌릴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의장실과 회의장 밖 복도, 그리고 로툰더 홀에서였다. 그때마다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취재하는 모습 때문이다. 알다시피 여의도의 겨울은 사납다. 그래서 차가운 복도에 앉아 취재하는 것을 보면 짠했다. 국회에 이런 풍경이 일상화된 지 오래다. 기자정신과는 다른 문제다. 열악한 취재환경에 주목해야 한다. 번듯한 기자회견장을 놔두고 왜 그러냐고 할 수 있다. 과열된 취재경쟁에도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제대로 브리핑하지 않기 때문이다. 걸핏하면 비공개를 이유로 취재를 가로막고, 기자들을 피한다. 주목받는 뉴스원일수록 심하다. 그러니 기자들이 찾아갈 수밖에 없다. 복도든 로툰더 홀이든 노트북을 펼치는 이유다.
이런 기자들을 향해 한국당 한선교 사무총장은 “아주 걸레질을 하는구먼. 걸레질을”이라고 했다. 참기 힘든 모욕이다. 고생한다는 의미였다고 변명했지만 궁색하다. ‘걸레질’은 기본적으로 막말이다. 나아가 취재활동을 얕잡는 경박한 언사다. 한선교는 아나운서 출신이다. 언론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러니 열악한 취재환경을 안타까워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거꾸로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이전에도 막말과 막된 행동으로 회자됐다. 최근에는 당직자에게 ××같은 새끼, ×같은 놈이라고 해 문제가 됐다. 이종걸 의원, 국회의장실 경호원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 거친 막말과 행동은 버릇인 셈이다. 공자는 “어진 사람은 말을 신중하게 한다(仁者 其言也訒)”고 했다. 적어도 한선교는 어진 사람은 못 된다.

이쯤해서 언론이란 무엇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언론은 지켜야 할 핵심 가치이다. 언론은 권력과 기득권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근간으로 삼는다. 민주화 역사는 언론자유를 쟁취해온 여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경없는기자회(RSF)’에 따르면 2019년 세계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은 180개국 중 41위다. 미국(48위), 일본(67위)보다 높고 아시아에서는 최고 순위다. 이제는 누구라도 정권과 대통령을 자유롭게 비판하는 시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언론을 폄하하는 풍조는 확산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을 즈음해서다. 정부 발표만 전달하는 언론에 대해 국민들은 ‘기레기(기자 쓰레기)’ 딱지를 붙였다. 부끄럽지만 일부 보도행태를 접하노라면 딱히 부인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인터넷 댓글에는 ‘기레기’가 넘쳐난다. 조선일보부터 한겨레까지 예외 없다. 자신들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는 ‘기레기’ 낙인을 찍는다. 진영논리에 포획된 나머지 외눈박이가 된 결과다. 끼리끼리만 환호할 뿐 상대는 인정하지 않는다. 무조건 불신하고 딴죽을 건다. 비난을 위한 비난만 넘쳐난다. 특정한 진영논리를 대변하는 기사는 그렇다 치자. 팩트를 기반으로 한 기사조차도 공격한다. 마치 너는 누구냐며 진영을 분명히 하라는 듯하다. 가장 큰 책임은 언론에 있다. 사실을 가장해 교묘하게 편을 가르고 상대를 배척한 책임이 크다. 나아가 기계적인 비판에 안주한 무책임이 더해진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편승한 정치인들도 문제다. 이낙연 총리가 언급한 신문론이 그렇다. 이 총리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2주년 대담 이후 이렇게 썼다. “신문의 문(聞)자는 ‘들을 문’이다. 그러나 많은 기자들은 ‘물을 문(問)’자로 잘못 안다. 근사하게 묻는 것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다. 잘 듣는 일이 먼저다.” 대담을 진행한 KBS 송현정 기자를 염두에 둔 글이다. 언뜻 생각하면 맞는다. 그러나 듣는 주체가 바뀌었다. 새롭게 듣는 주체는 독자다. 기본적으로 기자는 묻는 사람이다. 국민을 대신해 권력자를 상대로 물어야 한다. 더구나 그날 대담 제목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묻는다’였다. 많이 묻는 게 마땅했다. 송현정은 기자로서 책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러니 칭찬받을 일도 아니지만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이 총리의 신문론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당 대변인들도 이 같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적어도 정당 대변인이라면 대중 언어와는 달라야 한다. 품격 있는 단어와 정제된 문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매일매일 쏟아지는 논평은 그렇지 못하다. 그저 막말에 대한 막말 반격에 머물러 있다. 바른미래당 김정화 대변인은 “금수(禽獸)보다 못한 인간은 되지 말자”고 했다. 비극마저 정쟁 대상으로 삼은 민경욱 한국당 대변인을 비판하면서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골든타임 3분’ 발언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금수로 받아쳐 거슬렸다.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블룸버그통신 기자 실명과 이력을 거론해 논란을 자초했다. 그는 “매국노에 가깝다. 검은머리 외신 기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본질은 사라진 채 한동안 외신기자단으로부터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심경(心經)에 이런 말이 있다. “옥구슬에 난 흠은 갈아 없앨 수 있지만 말로 비롯된 흠은 없앨 수 없다(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막말 논란을 더 이상 지켜보기에 국민들 인내는 한계에 달했다. 언제까지 진의가 잘못 전달됐다고 변명하고 흐지부지를 반복할 것인가.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 게 그나마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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