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기계를 제조·판매하는 현대건설기계와 현대중공업이 하도급 업체의 기술을 유용하다 결국 덜미를 잡혔다. 계약 상 '을'의 위치에 있는 중소·벤처기업이 대기업의 설계 도면 요구를 뿌리치지 못한다는 점이 악용된 사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하도급 업체의 기술자료를 유용한 현대건설기계㈜ 및 현대중공업㈜에 시정명령을 내리고 과징금 4억 3100만 원을 부과한다고 29일 밝혔다. 또 법인 및 관련 임원 2명에 대해선 검찰 고발이 예고됐다.
현대건설기계는 2017년 4월 3일 현대중공업의 건설장비 사업부가 분할 설립된 기업이다.
현대중공업은 자신이 도면을 전달한 제3의 업체에게 견적 제출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 기존 공급처에게는 납품가격 인하를 요구해 공급처를 변경하는 대신, 같은 해 4월 공급가를 최대 5%까지 낮췄다.
현대건설기계는 분할 설립 이후 2017년 7월께 하네스 원가절감을 위한 글로벌 아웃소싱 차원에서 새로운 하네스 공급업체를 찾아나섰다. 이 과정에서 3개 하도급 업체가 납품하고 있던 13개 하네스 품목 도면을 같은 해 10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3차례에 걸쳐 제3의 업체에 전달, 납품가능성 타진 및 납품견적을 내도록 했다.
현대건설기계는 공정위 조사가 한창이었던 지난해 4월에도 제3의 하네스 제조업체에게 도면을 전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밖에도 현대중공업 및 현대건설기계는 △지게차용 배터리 충전기 △휠로더 신규 모델용 드라이브 샤프트 △굴삭기용 유압밸브의 시제품 입찰에서 하도급 업체의 도면을 제3의 업체에게 제공하고 견적을 제출하도록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현대중공업은 2015년부터 2017년 4월 분할 전까지 38개 하도급 업체들을 대상으로 ‘승인도’라는 부품 제조에 관한 396건의 기술자료를 서면 요청 없이 제출받아 보관해왔을 정도로 갑을 지위를 이용했다. 현대건설기계도 2017년 4월부터 12월까지 24개 하도급 업체들에게 118건의 승인도를 요구하면서 서면 요청을 하지 않았다.
이처럼 기술유용의 경우, 계약상 을의 입장에 있는 중소기업으로서는 자칫 기존 계약의 취소 우려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등 사각지대를 만든다. 계약이 만료된 이후 기술유용을 신고해도 관련 행위에 대한 증명 역시 쉽지 않다.
이렇다보니 업계에서는 공정위의 적극적인 직권조사를 요구하는 분위기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현장의 어려움에 공감했다. 그는 최근 한 정책토론회에서 "중소·벤처기업의 혁신의욕을 꺾는 대기업의 기술유용 행위 등 반칙행위에 대해 중점적으로 감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기술자료를 제3자에게 제공한 뒤, 공급업체를 실제 변경하지 않더라도 기술유용 행위에 해당한다"며 "중소기업의 혁신 유인을 저해할 뿐더러 우리나라 산업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하는 기술유용 행위를 막기 위해 내년 상반기까지 3~4개 주요업종을 대상으로 모니터링과 직권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공정위는 지난해 7월과 10월 기술자료 유용행위에 대해 각각 두산인프라코어와 아너스를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