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인문학]말귀

2019-05-1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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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是非)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지만, 시비가 폭발하는 지점은 옳고 그름에 있지 않고 말꼬리에 있는 경우가 많다. 반말을 하거나 비속어나 욕설이 들어가거나 시비와는 상관없는 다른 꼬투리 말이 등장하면서 대개 시비는 격해진다. 시비가 생겨나는 이유는, 이쪽의 옳음이 부족하거나 상대의 그름이 과도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듣는 귀의 '청력'이 현저하게 약해지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남의 말은 잘 안 들리고, 내가 퍼부어야 할 말은 많다. 이게 시비의 정체다. 남의 말의 핵심은 잘 안 들리고, 그 말의 주변에 매달린 감정어(感情語)들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이게 시비의 '촉진자'다.

우리는 지혜로움을 '머리 좋음'과 '눈 밝음'으로 생각하지만, 뜻밖에 옛사람들은 귀가 밝은 것을 말했다. 총명(聰明)이라는 말이 그 의미다. 마이동풍(馬耳東風)이나 우이독경(牛耳讀經)은 동물의 덜떨어진 미개함에 빗대 인간을 조롱하는 말로 쓰였다. 봄바람이 부는데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말의 귀, 귀한 말씀을 읽어주는데도 심드렁한 소의 귀. 귀가 그토록 크고 잘 생기면 뭐하나. 알아들을 줄 알아야지.

생각하는 것,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윗길로 치는 '듣는 것'은 단순히 청력(聽力)을 뜻하는 게 아니라 맥락과 정황을 읽어내는 실력을 말한다. '알아듣는다'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그 이해력과 감수성과 눈치 따위를 의미한다.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듯이, 듣는다고 다 듣는 게 아니라는 얘기도 된다. 무엇인가를 듣는 태도에는 섬세하고 정밀한 감관의 작동과 지적인 활동이 있다. 예술 중에서 미술보다 음악을 더 높이 치는 관점도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말귀라는 말이 있다. 아까 예를 들었던 마이동풍의 '말귀'가 아니라, '말귀가 어둡다' '말귀를 못 알아듣다' 따위로 쓸 때의 그 말귀 말이다. 자세히 보면 '말귀가 어둡다' 할 때의 말귀와 '말귀를 못 알아듣다'의 말귀가 다른 뜻이라는 걸 발견한다. 앞의 말귀는 '말을 듣는 귀' 즉, 말의 이해력과 음미력을 의미한다. 그 귀가 어둡다는 얘기다. 그런데 뒤의 말귀는 '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표현이 되니 좀 어색하다. 이건 뭘까. 이때의 말귀는 '말의 귀(句, 구절)'를 말한다. 즉, 어구(語句)를 못 알아듣는다는 얘기다. 즉, 같은 말귀라도 쓰이는 자리에 따라 '귀'가 耳가 되거나 句가 된다.

이 두 가지 '말귀'가 헷갈리는 까닭은, 둘다 결국은 말을 알아듣는 힘에 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말귀가 어둡기 때문이다. 말귀가 밝은 것이 바로 총명(總明)이다. 들은 것을 잘 기억하는 일을 총기(聰氣)라고 부른다.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총기 있는 사람이 최고였다. 그가 총명한 사람으로 치켜세워졌으니 이른바 적자(適者)생존이었다. 그런데 문자가 발명되고 나니, 총기 있는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노트였다. '적자(筆記)'생존이란 우스개는 거기서 나온다. 이걸 아우르는 말이 둔필승총(鈍筆勝聰)이다. 대충 써놓은 기록이라도 그냥 듣고 기억한 것보다 낫다는 얘기다.

말의 시대는 '총(聰)'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때는 잘 알아듣고 그것을 오래 기억하는 자가 위너였다. 글의 시대로 옮겨오면서 그 총(聰)은 단순한 기억력이 아니라, 그 말의 다양한 뉘앙스를 이해하고 맥락을 풀 줄 아는 종합적인 지혜로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 문자를 넘어선 영상 녹화의 시대에는 총(聰)이 상대의 내면을 읽고 상황의 전망을 찾아내며 문제의 핵심을 타개하는 복합적인 지식활동으로 진화하고 있는 듯하다. 언론에서 매일 쏟아지는 칼럼과 리뷰와 논단은 총(聰)의 경연이다. 주의주장과 속셈과 강변과 허위까지를 가려내 진실의 중심을 읽어내는 말귀의 전쟁터다. 이게 온전한 저널리즘이다.

그런 세상으로 가고 있는데, 본말이 전도된 '말'들이 나라를 얼마나 시끄럽게 하고 있는가. '귀 없고 입 많은' 언론들이 죄다 나서서 허튼 시비의 춤을 추는 이 사회가 정상적인가.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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