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에는 6·25전쟁의 참상과 진실이 보존된 곳을 찾아 평화의 소중함을 배우는 것은 어떨까? ‘전쟁기념관’은 그런 여행을 하기에 매우 좋은 장소다.
전쟁기념관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로에 있다. 지하철 6호선 ‘삼각지’ 역에서 12번 출구로 나와 걸어서 3분이면 도착한다. 서울 사람들뿐 아니라 지방이나 외국에서 여행 온 사람들도 쉽게 찾아 갈 수 있다. 실제로 전쟁기념관에 가면 외국인들도 많다.
전쟁기념관은 옥내전시와 옥외전시로 구분돼 있다. 전시자료는 총 6300점이 넘는다. 옥내전시실 넓이는 1만4000㎡가 넘는다. 옥내전시실은 7개의 전시실(호국추모실, 전쟁역사실, 6·25전쟁실, 해외파병실, 국군발전실, 기증실 ,대형장비실)로 구성돼 있다. 6·25 전쟁실은 3개가 있다.
야외에는 6·25전쟁 당시 장비를 비롯, 세계 각국의 대형무기와 한국전쟁 상징 조형물, '광개토대왕릉비', '형제의 상', '평화의 시계탑' 등이 전시돼 있다. 옥내전시실 입구 양측 회랑에는 창군 이래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군·유엔군 전사자 명비가 있다.
‘형제의 상’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대형 조형물이다.
6·25전쟁 당시 한국군과 북한군이 됐던 형제가 전쟁터에서 극적으로 만난 실화를 조형화했다. 형인 박규철 소위는 한국군 제8사단 제16연대 소속으로, 동생인 박용철 하전사는 북한군 제8사단 제83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
◆형제의 상, 형제가 한국군과 북한군으로 전쟁터에서 만난 실화 조형화
원주 치악고개 전투에서 만난 형제는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에게 겨눈 총을 거두고 얼싸안았다. 한 덩어리가 돼 서로 안고 있는 형제의 모습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과 사랑과 용서, 평화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한다.
전쟁기념관에 가면 한국전쟁 관련 많은 기밀문서들을 읽을 수 있다.
1950년 5월 30일 평양의 스티코프 대사가 스탈린 등에게 보낸 남침 계획 진행을 보고하는 암호전문에는 “김일성이 모스크바 방문 중 요청한 무기와 탄약이 도착해 6월 1일까지는 각 군과 병사들에게 모두 지급될 예정임. 김일성은 ‘6월 말까지는 전투태세가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음. 총참모장이 작전 계획을 김일성에게 보고했으며, 김일성은 이를 승인하고 주 공격 방향을 지정했음”이라고 쓰여 있다.
한국전쟁 관련 문서는 아니지만 한국 현대사의 비극들 중 하나인 ‘여순사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내린 ‘여수·순천 지역 계엄령 선포문’도 관심을 갖고 읽을 만하다.
◆“반란군 숨겨주거나 내통하는 자 사형”..여순사건 계엄령 선포문
이 선포문에는 “1. 오후 7시부터 다음날 7시까지 일체 통행을 금함. 2. 옥내·외 집회를 금함. 3.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민중을 선동하는 자는 엄벌에 처함. 4. 반란군의 소재를 알 경우 즉시 보고할 것. 만일 반란군을 숨겨주거나 그들과 내통하는 자는 사형에 처함”이라고 쓰여 있다.
재일학도병 유물에도 눈길이 간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 학생들은 병역 의무가 없었지만 오직 ‘조국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641명이 참전해 135명이 전사했다. ‘어둠의 자식들, 신의 아들’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특권층의 병역 기피가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키는 현실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1950년 8월 10일 포항시에서 한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학도병은 편지에서 “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 十여 명은 될 것입니다.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라며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학도병은 다음 날 전사했다.
전쟁기념관에선 ‘인천상륙작전’ 등 한국전쟁에 대한 많은 영상도 상영한다. 6월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는 전쟁기념관 3층 ‘시네마영상관’에서 전쟁영화 ‘대장 김창수’를 상영한다.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