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차이나'로 불리는 베트남을 거론할 때 따라다니는 화려한 수식어들이다. 베트남은 2007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뒤 각종 규제 철폐로 각국에서 투자가 몰리며 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 급부상했다. 산업화와 사회고도화가 동시에 진행 중이며 차기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의장국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후보 물망에도 올랐다. 일부에서는 지난해 양대 도시인 호찌민과 하노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각각 7000달러, 5000달러를 넘어선 만큼 베트남을 이제 중진국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베트남 경제를 단순 수치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며 신중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특히 한국은 베트남 최대 FDI 투자국으로 현지에 약 6000개 기업을 진출시킨 데다, 상호 결혼이민자도 늘고 있는 데 따른 관계의 특수성 탓에 베트남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에 거품이 상당하다는 지적도 있다.
베트남에 20년간 거주한 교민 A씨는 “오래 전부터 현지(호찌민)에서 구리 무역업을 해왔지만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산업현장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포착된다. 베트남 남부의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인 섬유봉제업 공장장으로 근무하는 교민 B씨는 “그동안 우리 공장은 주로 납품(OEM)계약을 통해 수출을 해왔지만 베트남 경제가 활황세라서 내수판매로도 눈을 돌렸다. 하지만 실제 생각보다 내수물량은 잘 팔리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구매력이 상당히 약한 것 같다”고 전했다.
호찌민에서 의료장치 수입업을 한다는 교민 C씨도 “아직까지 발주물량을 보면 베트남은 약한 부분이 많은 것 같다”며 “다른 국가에서 의료장치 수입업을 했을 때는 보통 40피트 기준 컨테이너 4~5개를 발주했지만 베트남은 분기별로 아직 1개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경제 관련 수치가 매년 기록을 경신하고 있지만 실제 서비스, 유통, 섬유, 기초자재 등 업계 현장에서 느끼는 상황은 통계와는 많이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업계에서는 초창기 베트남의 산업규모가 워낙 작았기 때문에 산업거래량이 증가하는 수치를 피부로 느끼기 어렵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현지 한 업계 관계자는 “사실상 최근의 베트남 경제 수치는 베트남 GDP의 28%를 차지하는 삼성전자 베트남을 포함해 일본, 대만 등 대규모 외자기업들의 실적이 떠받치고 있는 부분이 많다”며 “이를 내수로 면밀히 들여다보면 실제 많은 현지 제조기업들은 OEM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된 시스템도 갖추지 못한 '구멍가게' 수준의 기업들도 태반”이라고 전했다.
실제 베트남의 GDP 규모는 지난해 기준 2238억6399만 달러로 세계 45위권이다. 한국(1조5302억 달러)에 비하면 7분의 1 수준이며, 아세안 경쟁국인 태국(4552억2092만 달러)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를 1인당 실질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인구가 1억명에 달하는 베트남은 한국이나 태국보다 더 낮은 수치가 나올 수밖에 없다. 베트남 최대 기업이라는 빈(Vinh)그룹조차 지난해 매출이 5조9000억원에 불과했다.
경제성장률 또한 지난해 기준 7.08%로 같은 신흥국으로 부상 중인 인도(7.4%)보다 낮고 필리핀(6.8%), 중국(6.6%)과 비교하면 불과 0.5%포인트 남짓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추산한 지난해 세계 경제성장률은 평균 3%대였다. 자연증가분을 제외하면 베트남 경제성장률이 실제 수치보다 더 낮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현지 한 업계 관계자는 “베트남이 과거 한국이나 중국처럼 두 자릿수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면 몰라도, 6~7%대 중속성장 추세로 보면 베트남 경제 발전 속도가 생각보다 더딜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아세안 국가들도 4~6%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 중인 만큼 베트남이 태국 등을 따라잡으려면 최소 2배 이상의 양적인 경제성장을 이뤄야 수년 후 경쟁국의 경제 규모와 구매력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지난 수년간 수많은 (한국) 중소업체들의 지사가 베트남에 설립됐지만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법인 및 지사는 손에 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치로만 바라본 베트남 경제와 현실 베트남은 완전히 다르다”며 “베트남에 진출하려면 각 분야의 실제 구매력에 대한 정확한 현지 조사를 거쳐야 한다. 무분별한 베트남 진출에 이제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트남, 당분간 성장 정체될 수도"
삼성전자 베트남 매출증대 기대 어려워...‘낮은 노동생산성’도 문제
한편 베트남이 중진국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재진 한얼 베트남 투자컨설팅 대표는 “베트남이 낮은 노동생산성과 외자기업들의 매출부진 위험을 해결하지 못하면 '낮은중간소득국가(Lower Middle)'에 진입한 이후 정체현상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제노동기구(ILO)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의 1인당 종합 노동생산성(PPP)은 2017년 현재 161%로 미얀마(212%), 라오스(173%)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특히 제조업 중심의 베트남 경제에서 공업분야 1인당 PPP(116%)는 필리핀(123%)보다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 대표는 “1인당 PPP는 외자기업들이 FDI 여부를 결정할 때 검토하는 핵심적인 수치”라며 “PPP가 계속 낮아질 경우 FDI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베트남 경제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와 같은 대규모 외자기업들의 실적부진도 베트남을 중진국 함정으로 몰아넣을 주요 위험요소 중 하나로 꼽혔다.
시장조사업체 IDC는 최근 낸 보고서에서 “삼성전자 베트남의 2019년 출하량은 2% 감소가 예상된다”며 “이는 세계 스마트폰시장의 성장이 정체된 영향이 크다. 삼성전자 베트남이 과거와 같은 성장세를 이어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 베트남 경상수지는 최근 2개월 연속 적자행진을 했다. 올해 2월 현재 8400만 달러의 누적적자를 기록했다. 베트남통계청(GSO)은 수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주요 품목인 전자부품의 수출 둔화에 따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베트남 정부도 '저성장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관련 수치 조정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 정부는 올해 경제 성장률 목표치를 당초 6.6%에서 6.58%로 낮춘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한 대표는 “외자기업들의 수출 실적 부진의 경우, 베트남 내수경제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고용불안,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 경제심리지수(ESI) 등에 영향을 미친다”며 “전자업종이 이끌어나가는 베트남 제조업 분야의 구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는 교육수준이 높은 점이 베트남의 최대 장점이자 베트남이 향후 중진국 함정을 돌파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엔의 국가별 인적자원지수(HDI, 2015년 기준)에 따르면 베트남의 교육수준은 이미 '중상(Upper Middle Class)' 단계로 특히 중고등학생들의 수학능력(495점)은 아세안 평균(3개국 기준 415점)에 비해 압도적이다. 과학 등 일부 과목에서 베트남(525점)은 한국(516점)과 미국(496점)을 제치고 최우수 클래스에 위치해 있다.
한 대표에 따르면 베트남의 인적자원 고도화는 사회지표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분야 중 하나로 첨단기술 및 소프트웨어산업 등 고부가가치 산업 활성화도 주목할 만한 산업변화다.
그는 “우수한 인적자원이 고부가가치 산업과 잘 접목된다면 베트남은 빠르게 대외의존형 경제체질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이라며 “특히 베트남 정부가 적극 후원하고 베트남 최대기업이 추진 중인 '빈패스트(VinhFast)' 같은 신규 제조업의 성공 여부가 향후 베트남 경제 변화를 이끄는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