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현장]유관순 뼈가 망우리에? 17세 소녀 난아가 묘비 앞에서 외쳤다

2019-02-20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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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망우리 독립투사묘 '10대 취재단'①] 지금의 어린 눈으로 그날의 어린 죽음을 만났다

[유관순 열사]


[망우공원묘지 답사와 탐사취재를 맡은 10대 취재팀 = 김호이(부팀장·19·극동대), 강지현(19·서울여대), 김준수(19·서경대), 김해온(19·해성국제컨벤션고), 윤난아(17·세종국제고), 이은성(18·차의과학대), 이재건(18·아현산업정보학교), 이푸르메(19·서울대), 장예령(17·구리여고), 홍준영(19·동아대) 10명의 학생팀원과 이상국 팀장(아주경제 논설실장)]

"저 길 가에 있는 이태원묘지 합장비가 보이죠? 얼핏 보면 바위를 세워놓은 것에 불과해 보이지만 예사로운 비가 아닙니다. 1936년 이태원 공동묘지를 망우리로 대거 이장할 때 3만3000기 중에서 2만8000기는 연고를 못 찾은 무연고 묘였다고 합니다. 이 묘소들의 뼈를 추려 화장을 해서 망우리에 합장을 합니다. 여기에 유관순 열사의 뼈도 있었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여기 있다고요?"

"열사는 1920년 10월 12일에 옥사했고 10월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힙니다. 묘비도 표석도 없이 말이죠. 그러다가 공동묘지 이장 때 2만8000기 무연고 묘지에 섞여서 망우리로 들어온 거죠. 그러니까 이태원 묘지 합장비 아래에 유관순의 유골이 있는 거죠. 다시 보면, 저 비석이 각별해 보일 겁니다. 공원 관리사무소에선 명절마다 저곳에 제사를 지내준다고 하죠."
 

[2019년 2월 8일 망우공원 현장취재에 나선 10대 기자들.]



유관순 열사가 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을 때 17세였고, 순국했을 때는 18세였다. 지금 18세의 눈으로, 그날의 소녀 유관순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땠을까. 무시무시한 고문 속에서도 당당히 '독립'을 부르짖던 뜨거운 영혼을 같은 또래인 그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이번 망우리 탐사는 100년을 사이에 둔 그때의 10대 소녀와 지금의 10대 소년·소녀를 만나게 하는 '낯선 배치'를 기획한 것이었다. 묘비 앞에 선 10대들의 표정에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책이나 인터넷 속에 들어 있는 역사적 정보가 아니라 현장을 걷고 차가운 비석을 어루만져 보는 시간여행이 시작됐다.

10대 학생들과 공동묘지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2019년 봄이 아직도 멀어 으스스한 2월 망우공원. 낯선 이들이 묻힌 곳을 찾아 노트에 깨알같이 뭔가를 적고 부지런히 사진을 촬영하는 그들은 본지의 학생특별취재팀이다. 3·1운동 100주년이 임박한 무렵, 망우산에 묻힌 독립운동가들을 취재하러 출동했다. 사전에 보훈처와 망우공원묘지 관리사무소(서울시설관리공단 소속)를 탐문하여, 일제강점기 감시대상자 인물기록에서 찾아낸 10명을 집중 취재하기로 했다. 오세창(1864~1953), 한용운(1879~1944), 문일평(1888~1939), 서동일(1893~1966), 김병진(1895~1964), 유상규(1897~1936), 오재영(1897~1948), 서광조(1897~1972), 방정환(1899~1931), 오기만(1905~1934). 이렇게 총 열 분이다. 10대의 눈으로 본 독립운동가의 과거의 현재는 어땠을까. 답사 코스를 중심으로 11명의 대화 형식으로 기사를 정리했다.
 

[이태원 합장비 표지판]

[유관순의 뼈도 묻혀 있는 이태원 합장비.]

 

[2018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와 서울시설공단이 조성한 유관순 분묘합장 표지비.]



서울 중랑구 망우로에 있는 동부제일병원에서 약간 가파른 길을 끼고 13도창의군탑을 지나 망우공원 관리사무소 앞에 집결한 취재대원들은 진입광장 왼쪽으로 난 동쪽 산책로를 택했다. 노고산 취장비를 지나며 구리 쪽으로 크게 도는 길이다. 초입에는 우리가 답사할 묘지가 없는지라 걸어가며 기초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다.

이 팀장= 망우리는 공동묘지가 되기 이전에도 망우리였다고 하던데요?
장예령= 예. 자료를 찾아보니, 1392년 조선 개창 무렵에 태조 이성계의 일화가 있었던데요? 태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조상들의 능지를 찾아서 구리의 동구릉 일대를 답사했죠. 당시 무학대사와 동행을 했는데, 그 스님이 이런 말을 합니다. “동구릉은 명당이긴 한데 선왕들을 모시기보다는 태조가 나중에 묻혀야 할 좋은 자리입니다.” 이 말에 태조는 동구릉을 자신의 묏자리로 삼았죠. 그리고 한양성으로 돌아오면서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고개에서 태조는 동구릉 쪽으로 바라보며 “나는 이제 망우(忘憂, 근심을 잊음)하게 됐구나”라고 흐뭇하게 한숨을 내쉬었답니다. 이 때문에 이 산 이름이 망우산으로 됐다는 거죠.
홍준영= 하지만 망우산 일대가 공동묘지가 된 것은 훨씬 뒤라고 합니다. 1936년 식민지 시절 일제가 한양 도심에 있는 이태원 공동묘지가 너무 커지자 그곳을 택지로 조성하려고 망우산으로 옮겼죠. 당시 이름은 경성부립묘지였고요. 1966년 무렵 4만7000여기의 묘소가 들어차 있어서 망우산이 만원(滿員)이 되어 더 이상 묘지를 쓸 수 없을 정도가 됐죠. 7년 뒤인 1973년 추가 분묘 사용이 금지됐죠. 지금(2015년 현재)은 이곳에 7900여기가 모셔져 있습니다.
윤난아= 지금도 상당히 많은 묘소가 있군요. 그런데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왠지 좀 안타까운 느낌이 드네요.
이푸르메= 독립운동가들이 나라를 위해 싸우다 보니 자신의 인생이나 가족을 돌볼 겨를이 없어 집안이나 후대에서 대개 가난으로 고통을 받아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국가가 이런 사정에 관심을 가진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요. 망우리에 묻힌 많은 분들 또한 그런 비극들의 연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강지현= 일리가 있어요. 묘지의 위치를 보면, 망우산이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과 중랑구 망우동, 면목동에 나눠져 속해 있습니다. 동쪽으로 좀 트인 쪽에 보면, 한용운·오세창·문일평·방정환·유상규 선생 등 알려진 분들이 많이 묻혀 있군요. 서쪽 망우동에는 서동일·오재영 선생이 묻혔고요. 그리고 면목동 산자락에 묻혀 있는 서광조·김병진 선생은 안내지도에서도 묘소가 빠져 있어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은성= 지자체에서 최근 망우공원을 시민들의 힐링공간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발표했죠. 이곳에 카페나 회의실 혹은 강의실 같은 것을 만들어 활동과 휴식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프랑스의 정원묘지 페르라셰즈처럼 만들겠다는 건데요. ‘낙이망우(즐기면서 걱정을 잊다)’라는 이름의 웰컴센터가 생긴다고 하니, 분위기가 좀 달라지겠죠?(2편으로 계속)

[3·1운동 100주년 기념, 망우공원 독립투사 유적 10대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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